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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후면비사] 영화 없는 영화도시, 돼지들만 꿀꿀꿀
이영진 2006-11-30

지도층의 피난처 된 1950년대 부산, 날마다 흥청망청… 조폭들은 빨갱이로 몰려

‘돼지몰이’는 대개 “한 방향으로 몰아가기가 쉽지 않은” 상황을 뜻한다. 서로가 자신의 이득을 재는 탓에 결론을 내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꼴을 두고 하는 말이다. 1950년 부산에도 이른바 돼지몰이라는 게 있었다. 6월25일 전쟁이 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회 지도층과 부유층들은 부산으로 집결했다. 일본으로의 밀항을 꾀하려는 목적이었다. 당시 돈으로 많게는 1인당 150만원씩 내고 1천만원짜리 선박을 대절하기 위해 아우성들이었다. 이러한 혼란의 상황을 돼지몰이라고 불렀다. 지금 쓰이는 의미와는 다소 다르지만 잘못 쓰인 말 같진 않다. 돼지몰이의 가장 손쉬운 방법은 먹이를 던져두는 것이다. 정해진 먹이 앞에서 박 터지게 싸우는 돼지들, 그런 한심한 작태를 그때는 돼지몰이라 했다. “아침은 서울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라는 농담을 안주로 주고받으며 “평양을 3일 안에 점령하겠다”고 호언하던 이들이 돼지몰이 행렬의 거개였다.

돼지들이 꿀꿀대는 피난지 부산은 전쟁에도 불구하고 흥청망청 불야성을 이뤘다. 6월27일 새벽 “담요 한장과 서류 몇 가지를 챙겨서” 3등 열차를 타고 피난길에 오른 뒤 한달 동안 대전, 대구, 목포, 부산, 대구 등을 떠돌았던 이승만의 행태를 생각하면 가진 자들의 작태는 예상 못할 일도 아니었다. “(국가 원수를 위해) 불안요소를 제거한답시고” 무려 1만여명의 시민들을 학살한 뒤에 정부는 8월18일 부산에 임시정부를 마련했으나 혼란은 더욱 가중됐다. 오직 유흥가만이 들썩거렸다. 서울에서 밀려내려온 고급 장교들과 부유층 인사들로 댄스홀은 미어터졌고, 요릿집 문간은 거드름 피우는 세도가들의 잦은 출입으로 닳아지기 직전이었다. 반면 민중은 공포를 달랠 만한 위안의 공간을 갖지 못했다. 비상사태 선포와 함께 영화 상영은 중지됐고, 부산의 극장에선 주로 반공 궐기대회와 국회 회의 등과 같은 행사만이 진행됐다.

이 무렵 극장에선 연극 공연이 간혹 열리긴 했으나 영화 상영은 거의 없었던 듯하다. 물자 부족은 물론이고, 경찰에서 극장 출입을 하는 이들을 모두 구속하기까지 했으니 그럴 법도 하다. 전쟁이 중부 전선에서의 격전으로 고착화되기 시작한 1951년 들어서도 경찰은 “시국을 인식치 못하고” 극장 출입을 일삼는 80여명의 시민들을 잡아들였다. 1951년 하반기에 들어서 외화 수입이 시작됐음을 감안하면, 포성이 울린 뒤 1년여 동안 극장은 개점휴업 상태였다. 대신 극장, 요릿집, 양품점 등을 상대로 ‘삥’을 뜯는 범죄 등이 적잖았다. 8월26일자 <부산일보>에 따르면, 경남지구 방첩대는 방첩대를 사칭해 금품을 갈취해온 부산 항구파 일당을 검거했다. 항구파 일당은 부산극장, 오주양행, 뉴아리랑 빠 등을 돌며 정보원이라고 사칭하며 각각 5만원씩을 취하고, 부유한 시민들에겐 가택조사를 한다며 금품을 압수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들통날 경우를 대비해 “조사기관에 밀고하면 어깨들을 동원해 가족을 몰살시키겠다”는 위협까지 가했다 한다.

부산에 갑자기 부유층이 몰려들었으니, 이들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늘어났을 것이라고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영화 상영은 중지됐지만 여전히 사람들이 운집하는 극장 주변을 어깨들이 어슬렁거린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항구파 검거 이후 방첩대의 발표 내용은 어이없는 과장 수준이다. 방첩대쪽은 항구파 일당이 “정부와 민간을 이간질하고, 방첩대를 무력화하기 위해” 이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고 발표한다. 좌익계열 사주를 받아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극장 등을 돌며 약탈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극장에서 정부 각 부처 회의와 반공회의가 수시로 열린 것은 사실이고, 또 이를 이용해 조폭들이 가짜 방첩대로 둔갑해 극장을 협박한 것도 이해가 가지만, 그렇다고 조폭에게 ‘허위선전 모략을 책동하는’ 망국적 악질분자 빨갱이라는 딱지를 불일 수 있었을까. 재빨리 짐을 싸서 한강을 건넌 돼지몰이 도강파(渡江派)들이 서울로 돌아간 뒤에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야 했던 민중을 “인민군에게 협조한” 부역자라고 몰아붙여 총살을 감행했던 뻔뻔함에 비하면, 극장 상대 조폭들을 ‘조직’ 사건으로 옭아매는 일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을 테지만 말이다.

참고: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 <한국 1950: 전쟁과 평화>(박명림, 나남출판), <한국 현대사>(서중석, 웅진지식하우스), <한국현대사 산책>(강준만, 인물과 사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