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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듀! 한국영화 100년의 벗이여 (1)
2001-09-21

<의리적 구토> <아리랑>과 함께한 한국영화의 발상지, 철거 뒤 2003년 멀티플렉스로 재개관

단성사 100년이 허물어진다. 자그마치 5천만명 이상이 드나들었던 놀이터가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그들의 새카만 족적만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여흥과 위락의 장소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난 한 세기를 버텨오는 동안, 단성사 돌벽은 시대의 어둠을 피해 군중이 찾아들어간 안온한 카다콤이었고, 그들이 차곡차곡 쌓아올린 소망의 앙코르와트였다. 좁디좁은 의자에 잠시나마 등허리를 기대고 그들이 피워올린 꿈의 환영은 언제나 푸른색이었기에, 진동하는 화장실의 지린내와 도사린 구석의 퀴퀴함은 아무래도 좋았다. 이제, 단성사는 없다. 그리고 시대의 꿈은 영원히 지하에 매장된다. 꿈의 체취를 맡고자 하는 열망이 남았다면 무너지기 전, 단성사의 기억을 거슬러볼 일이다.

제1장 셋이 모여(團) 뜻을 이루다(成)

1907.5.22 이토 히로부미의 압력에 의해 박제순 내각 사퇴하고, 이완용 내각 성립, 서울 전역에 콜레라 창궐.

“서울에서 사업을 하는 지명근, 박태일, 주수영 제씨가 발기하여 우리나라 연예계를 발전시킬 목적으로 관청의 승인을 받아 일대 연극장을 지금 파조교 근처에 건축중이다.”

(1907년 6월7일치 <만세보>)

“음탕하고 고약한 놈들, 어디 껌껌한 데서 남녀가 뒤엉킨단 말이냐” 보지 않아도 예상한 일이었다. 호기심에 극장 문턱을 넘었지만, 꼬장꼬장한 유림(儒林)들이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바로 옆에 앉은 팔뚝심 좋아 뵈는 천한 남정네들에게까지 삿대질을 하진 못했지만, 부인네들과 여학생들은 그들의 고성 탓에 매번 2층의 부인석으로 올라가야 하는 처지였다(단성사는 애초 부인석을 만들어놓긴 했으나, 임시 목조건물인 탓에 무너져서 이후 부상자가 발생하기도 한다).

성인군자의 기세가 예전 같진 않았으나 아직 도포자락 바람이 풍기를 쥐어틀던 시절의 단성사 안 풍경은 그러했다. 물론 양반네들이라고 응큼한 맘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 역시 창이나 가야금 공연이 끝나면 맘에 드는 기생의 다홍치마에 ‘가회동 아무개’라고 갈무리하는 어줍잖은 시 한수를 적고서 애틋한 로맨스를 기대하기도 했으니, ‘연예 단성사’라는 이름이 괜한 것은 아니었다. “단성사를 세움은 일반 연예인이 생활할 수 있는 일터를 제공해주기 위함이고, 그 수익금은 교육이나 자선사업에 쓰겠다”는 그럴듯한 취지를 개관 3일 전 만천하에 고했지만, 돈많은 동대문 장사치들이 직접 기생 구제에 나섰던 건, 기방 출입을 밥먹듯이 하는 자제들 때문에 그럴 바에야 차라리 싼값에 기생 구경할 수 있는 방책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는 말도 전해져올 정도니. 단성사 최초의 스타가 노기(老妓)들이었다는 사실은 당연한 것이었다.

당시 노기라고 해봤자 나이는 갓 스물을 넘긴 이들이 태반이었다. 아홉살에 기생학교에 들어가 가야금, 창, 승무, 단가 등 전공 하나씩을 갈고 닦았지만, 스물이면 막장이었던 이들은 조합까지 결성해서 신문에 공연 광고를 할 정도였다. 심지어 인기투표까지 벌어져 단성사에 출입하던 한성권번 김봉선이 1812표로 1위를 차지했다는 소식이 보도되기도 할 정도로 세간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제2장 <아리랑> 고개에 한많은 민족의 신음을 벗어두다1926.6.10 전국적인 대규모 만세시위. 7.17 일제, 조선공산당 대검거 “여하간 이 아리랑이란 영화는 과거의 조선의 영화를 모조리 불살라버리고 이 돈 없고는 살 수 없고 한숨 많은 이 땅 위에서 슬피 대공(大空)을 울리어 그 무엇을 광호(狂呼)하는 한개의 거상이다.”

(승일, <별건곤> 1926년 1월호 ‘라디오, 스포츠, 키네마’ 중에서)

달리자마자 넘어졌다는 비유가 딱 맞을 정도였다. 단성사는 1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경영 악화의 길을 걸었고, 급기야 일본인 무라다의 소유로 넘어가는 꼴이 된다. 이후 10여년 동안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긴 하지만, 1915년 화재로 인해 건물 전체가 전소되는 시련도 겪는다. 그러던 단성사가 회생의 기운을 얻은 때는 1918년. 광무대의 소리꾼이자 당대의 ‘흥행사’였던 박승필이 단성사를 인수하면서부터였다. 그는 곧장 수하에 있던 이를 일본에 보내 촬영술을 배우게 하고 영사기(그 전까지는 총독부의 영사기가 유일했다)를 들여오고 신극좌의 배우 김도산과 함께 연쇄극 <의리적 구토>(1919)를 만든다.

배경화면만을 찍어 무대에 쏘는 연쇄극이었지만, 관광객(觀光客)들은 경성 시내 장면이 나오는 첫 장면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는 등 반응은 뜨겁기 그지없었다. 평소 40전 하던 상등석의 관람료는 1원으로 올랐고, 하등석도 80전에 팔릴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대박’을 맛본 박승필은 이후 단성사 내에 촬영부를 두고 <장화홍련전>(1924)을 제작한다. 단성사의 부활은 일본인 하야가와가 소유한 진고개(지금의 충무로)의 황금관(이후 국도극장)과의 보이지 않는 경쟁 심리도 작용했다. 하야가와는 미소년을 뽑아 일본에 보내 변사로 키우는 등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상황이 이러했으니, 박승필도 이러다간 종로통 전체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나운규의 등장은 단성사를 단박에 최정상으로 끌어올린다.

일본인을 상대로 하던 황금관(이후 국도극장), 대정관 등은 물론이고 조선인들이 다니던 우미관, 조선극장들과의 종로통의 관객까지 끌어모은 것이다. 1926년 10월1일, 조선총독부 청사 낙성식 예정일에 맞춰 개봉한 <아리랑>은 “눈물의 아리랑, 웃음의 아리랑, 막걸리 아리랑, 춤추며 아리랑”이라는 광고문구처럼, 종로 바닥 군중의 혼을 쏙 빼놓으며,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라는 주제가를 입에 물도록 만든다.

제3장 단성사와 함께 온 모더니즘

1930.9 서울시내 교통사고 한달 1백건 넘어. 인력거 줄고 자동차 급증 1935.10.4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 단성사 개봉 1937.7.28 중·일 전쟁 발발

“누가 이 영화를 발명하였느냐. 인간이다. 그런데 인제는 영화가 인간을 좌우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맹랑하다면 맹랑한 세상이 되었다” “세익스피어를 모르고 로망 로랑을 모르는 대신에 크라클 케이블을 알고 로버트 테일러를 알면 그만이다.”

(하소, <조광> 1937년 12월호)

땅거미가 종로 바닥을 거닐고, 단성사 나팔소리(일반적으로 저녁 7시에 1회 상영을 원칙으로 했는데, 1927년부터는 상영시간을 알리기 위해 궁정악사 격인 옛 협률사 악사들이 단성사 간판 뒤에서 나팔을 불었다고 한다)가 길게 목을 늘어뜨릴 무렵, 1920년대, 종로통은 나들이 채비를 마친 이들로 가득 찼다. 그네들의 시선은 빙글빙글 파슨스군(이 당시 희극배우들에게는 이러한 형용사를 붙여 선전했다. 또한 남자배우 뒤에는 씨, 군, 선생을 여자배우의 경우에는 양, 여사라는 호칭을 붙였고, 심지어 동물영화에도 명견 빠루군이라고 적었다)이나 대감독 구리후이쓰(D. W. 그리피스)씨의 작품으로 향하기도 했지만, 가끔 맥고모자를 지긋이 눌러쓰거나 실크 스타킹으로 양장을 마무리한 멋쟁이들을 보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극장 안의 불이 꺼지면 진짜 모던 보이와 걸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한편 끝나면, “샬리 템플의 일주일 수입이 얼마냐”는 궁금증으로 시작해서 “존 크로포드가 몇 번째 결혼을 한다더라”라는 소식을 나누고 “게리 쿠퍼의 외투가 어떻다”는 품평으로 대화가 끝이 나야 직성이 풀리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1930년대부터 단성사는 쇠락의 기운을 보인다. 발성영화가 등장하고, 이를 위한 신식 극장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32년 단성사의 지주 박승필이 사망한 것도 결정적이었다. 죽기 전까지 박승필은 <아리랑> 이후 나운규가 만든 영화에 끊임없이 투자했지만, 극장 뒤쪽에 자리를 잡고 있던 순사들의 칼질에 영화는 만신창이가 됐으니 흥행이 될 리 만무했다. 이후 극장 재건축에 들어간 2년 동안 단성사는 지방 원정공연으로 맥을 잇고, 첫 발성영화인 이명우 감독의 <춘향전>을 상영하지만, 그동안 쌓인 빚 때문에 1936년 일본인 전용극장인 요시다 흥행에 흡수되어 3년 뒤엔 대륙극장으로 개명된다.

단성사의 몰락과 함께 “아아. 그들의 운명은 어찌될 것인가. 다음 주일에 계속 보아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멘트나 주인공이 악한의 면상을 향해 주먹을 날릴 때쯤 흥분한 관객의 맥동 소리와 보조를 맞추어 “어드러둥둥” 하는 독특한 추임새로 관객을 휘어잡던 종로통의 변사들도 어둠 속에 묻히는 신세가 됐다. 결국 노년에 마약에 빠져 객사하는 등 변사들의 비참한 최후야 사실 스크린 속 살아 움직이고 말하는 환영에 관객을 뺏긴 뒤 타올랐던 질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을지 모른다.

제4장 해방, 전쟁, 그리고 부활.1950.6.25 한국전쟁 발발 1953.7.27 휴전협정 조인 1958.10.15 뇌염으로 3개월 동안 전국적으로 1500명 사망 1961.5.16 비상계엄 선포 1965.12.18 한-일 국교정상화

“수많은 영화를 볼 때마다 우리들은 생각했었다. 언젠가는 이 누추한 현실을 벗어나, 저런 아름다운 곳으로, 생활의 때가 묻지 않아 마음에 드는 곳 어디론가 멀리 가보고 싶다고.”

(안정효,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중에서)

포화가 잦아들 무렵이라 해서 영사기를 돌릴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 서민들의 가슴을 달래주는 것은 만담이었고, 대부분의 극장에선 ‘뚱뚱이와 홀쭉이’ 같은 쇼가 진행됐다. 배우들 또한 무대에 올라야 했고, 서글픈 노래 한 자락을 뽑아야 했던 시절이었다. 단성사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미8군 덕(?)에 명화들을 일주일씩 걸 수 있었던 게 다행이었다. <애수> <역마차> <쿼바디스> <셴>(조지 스티븐스의 <쉐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대장 부리바> <나바론> 등이 50년대 말까지 상영됐다. 이처럼 미군부대 뒷구멍으로 흘러나온 이들 영화의 프린트 한벌은 단성사 800석을 가득 메운 뒤에도 화면에 비가 주룩주룩 내릴 때까지 조선호텔 옆 경남극장 등 재개봉관과 3봉관인 용산구의 성남극장은 물론이고 지방 극장까지 돌아야 했다. 물론 한국영화 제작의 싹이 아예 잘린 것은 아니었다.

1954년 3월31일, 정부는 입장세법을 개정하여 국산영화에 대해 면세조치를 취했고, 이듬해 국도극장에서 상영된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은 10만여명에 가까운 관객을 불러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단성사는 주로 애정물을 선호했던 중앙극장과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며 서부극과 전쟁영화 등 외화를 주로 내세웠다. 이러한 경향은 60년대에도 이어졌고, 두달 만에 32만3천명을 불러들인 <역도산>(1965) 또한 외화 수급에 문제가 생겨 궁여지책으로 끼워넣은 해프닝의 결과였다. 당시 상영하기로 했던 영화의 제목이야 알 방도가 없지만, 관계자들에 따르면 간판까지 걸어놓았는데 프린트가 오지 않자 이를 대체할 영화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KBS의 한 기자가 한국의 역도산이라는 무술인과 일본 프로레슬러 사이에서 벌어진 레슬링 시합을 찍어놓았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부랴부랴 아나운서를 하나 사서 거짓말로 해설을 넣었다. 그렇게 해서 겨우 개봉을 하긴 했는데, 결과는 대만원 사례였다. 밀려든 인산인해에 종로경찰서의 기마대까지 출동해서 줄을 세울 정도였다. 그로부터 1년 뒤, 한·일 두 나라 정상 사이에 밀약이 오가자 일어난 대규모 군중 시위는 어쩌면 예견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 아듀! 한국영화 100년의 벗이여 (1)

▶ 아듀! 한국영화 100년의 벗이여 (2)

▶ 역대 단성사 주인들

▶ 단성사 터주대감 조상림 상무

▶ 단성사에 얽힌 나의 추억1 - 영화감독 김수용

▶ 단성사에 얽힌 나의 추억2 - 영화감독 이장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