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다양했다, 그러나 `발견`은 미미했다
2001-09-21

수상작은 예상 밖, 거장은 부진한 나른한 축제

영화제가 열린 열흘 남짓한 기간 동안 베니스에는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쨍하게 눈부신 햇살과 끈적거리는 바람에 웬만큼 저항력이 생겼다 싶을 때, 예고도 없이 시린 바람이 불어닥쳤고 가끔은 천둥번개를 동반한 소낙비도 내렸다. 차라리 그런 ‘반전’이라도 있기를 바랐다. 이렇다 할 화제작도 없고 이슈도 없이 지루하고 나른하게 이어지던 영화제는 결국 한순간의 흥분과 긴장도 제공하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혹시 베니스영화제는 막판 ‘깜짝쇼’라도 보여줄 요량으로 <몬순 웨딩>에 황금사자상을 안긴 건 아닐까.

황금사자상부터 남녀주연상까지, 이견분분

9월8일 저녁, 영화제 폐막식이 열린 살라 그란데에서는 환호와 침묵과 야유가 엇갈렸다. <몬순 웨딩>은 여러 버전으로 나돌던 ‘수상 유력작’ 리스트에 단 한번도 오르지 않았던 작품. 기자단은 다소 어리둥절했지만, 전통과 축제에 관한 관능적이고 이국적인 코미디를 지지하던 베니스 현지 관객 사이에선 환호가 터져나왔다. 미라 네어 역시 아무 기대가 없었던 듯, 연단에 올라서도 놀라움과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 상은 나의 사랑이자 뮤즈인 조국 인도의 것이다.”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최초의 여성감독이 된 미라 네어는 상기된 얼굴로 “<몬순 웨딩> 제작진의 90%가 여성이었다는 건 우연일지 모르지만, 이 상의 절반은 세상 절반인 여성에게서 나온 것임을 밝혀두고 싶고, 앞으로 카메라를 들 소녀들에게 신호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여름 더위에 인간의 잔인한 본성을 빗댄 오스트리아영화 <한여름>의 울리히 자이들 감독은 심사위원 대상 수상자로 호명됐는데, 황금사자상에 못지않은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는 수상 소감을 밝히는 자리에서, 이 영화에 투자한 지난 5년의 세월을 돌아보며 감회에 젖었고, “오스트리아영화계를 환기시키는 하나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황금사자상 수상이 유력하다는 소문이 무성했고, 폐막식 전에 넷팩상을 받기도 해 나름대로 기대에 들떴을 <비밀투표>의 바바크 파야미는 감독상을 수상하는 데 그쳐 표정관리를 애쓰는 눈치였다. 야유가 터진 대목은 바로 남녀주연상을 발표하던 순간. 이탈리아감독 주세페 피초니가 감독한 <내 눈 속의 빛>의 남녀 주연이 나란히 수상자로 발표된 것이다. 중년 남녀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이 영화는 멜로드라마로서의 미덕도 있고 주연배우들의 연기도 탁월했지만, 이탈리아 평단에서마저 ‘실망’스럽다거나 ‘최악’이라는 혹평이 나돌았다. 석연찮은 눈길과 냉랭한 공기를 의식한 남우주연상 수상자 루이지 로 카스치오는 “언론의 혹평은 조급함에서 나온 것”이라고 일갈했고, 여우주연상 수상자 산드라 세차렐리는 “이 상은 내 생각이 맞았다는 것, 그리고 관객도 지지를 보낼 것이라는 확신을 준다”고 덧붙였다.

<몬순 웨딩>에 황금사자상을 안겨준 데 대한 분석은 분분하다. <일 가제티노>는 “관객과 언론 모두를 만족시키기에 무리가 없기 때문에” <몬순 웨딩>이 낙점받은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현재의 영화’부문 심사위원들은 로랑 캉테의 <시간의 고용자들>이 단연 뛰어났기 때문에 논쟁을 벌일 필요가 없었지만, ‘베네치아 58’부문에서는 개인적 취향이 아니라 영화적 완성도 등의 객관적 잣대로는 한편의 손을 들어주기가 어려워, 길고 뜨거운 토론이 있었다는 후문이다. 끝까지 이들을 고심하게 만든 영화들은 울리히 자이들의 <한여름>과 주세페 피초니의 <내 눈 속의 빛>, 호안 보텔로의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전해진다. 하지만 폐막 전날까지 떠돌던 소문으로는, 바바크 파야미의 <비밀투표>와 주세페 피초니의 <내 눈 속의 빛>, 그리고 월터 살레스의 <태양의 저편>이 각축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소문과 달리 월터 살레스는 수상은커녕 호평 하나 건지지 못하고 돌아갔다.

반면, <내 눈 속의 빛>은 심사위원들의 막판 저울질을 당한 영화임에 틀림없는데, 심사과정에 주최국인 이탈리아영화에 뭔가 상을 안겨야 한다는 강박이 작용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다. 폐막식의 분위기로 알 수 있었지만, 남녀주연상 수상결과에 가장 반발이 심했다. 언론과 관객의 반응을 종합해봤을 때, 여우주연상으로는 <타인들>의 니콜 키드먼이, 남우주연상으로는 <해리는 어떻게 나무가 됐나>의 콤 미니가 유력했기 때문이다. 수상결과에 대해 이렇듯 말이 많으리라는 걸 미리 짐작한 것일까. <일 가제티노>는 심사위원장인 난니 모레티가 폐막파티에도 참석하지 않고 폐막식이 끝나자마자 “도망자처럼 리도를 빠져나갔다”고 보도했다. 그 와중에도 그는 동료 심사위원들에게 ‘입단속’시키는 것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어제’에 초점을 맞춘 거장들, 관객 실망시켜

알베르토 바르베라 집행위원장이 올해 행사를 기획하면서 품은 야심은 “좀더 많은 나라에서 영화들을 불러모은다”는 것이었다. 20편의 영화가 각축을 겨룬 ‘베네치아 58’부문에는 오스트리아, 멕시코, 루마니아, 이스라엘, 세르비아 등을 포함해 모두 15개 국적의 영화가 선보였고, 다양한 문화를 엿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무슨 우연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들 작품 중 상당수가 ‘오늘’보다는 ‘어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민족과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는, 다소 ‘시대착오적’인 테마를 취하고 있다는 것도 특징적이었다. 연극의 형식을 빌리거나 연극을 섞은 작품이 많았다는 것도, 영화의 화법이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가 됐다. 내용적으로는 <태양의 저편> <해리는 어떻게 나무가 됐나> <루나 로사> 등이 일제히 대물림된 원한과 복수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채를 띠었다. 안타까운 사실은 영화의 ‘다양성’에 힘을 쏟다보니, ‘함량’이 달리는 작품들도 눈에 띄었다는 것. 특히 거장의 부진은 올 영화제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대목이다. 아모스 기타이의 <에덴>, 베르너 헤어초크의 <인빈서블>, 앙드레 테시네의 <멀리>는 감독의 이름 하나 보고 몰려든 관객을 실망시켰다.

영화제가 아무리 ‘작가주의’와 ‘제3세계’를 지향한다고 해도, 관객이 좋아하는 건 역시 할리우드영화다. 경쟁 또는 비경쟁에 오른 할리우드영화의 스타들이 행사기간 베니스를 찾아오기 때문에 더욱 화제가 되는 것이다. 실제로 니콜 키드먼의 <타인들>, 헬렌 헌트와 샤를리즈 테론의 <옥전갈의 저주>, 덴젤 워싱턴과 에단 호크의 <트레이닝 데이>, 조니 뎁과 헤더 그레이엄의 <프롬 헬>, 할리 조엘 오스먼트의 는 예외없이 매진사례를 빚었다. 인디영화의 경우도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테이프>나 스파이크 리의 <휴이 P. 뉴톤 스토리>는 감독의 지명도 때문에 눈길을 끈 작품들. 이 밖에 이탈리아 현지 관객은 자국영화와 감독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보여, 비토리오 데 시카와 프랑코 베르니니의 작품들, 그리고 안토니오니와 파졸리니에 관한 다큐멘터리에 열광적으로 환호하기도 했다.

영화제 행사장 중 하나인 카지노 건물에 있는 낙서판에 관객이 감상평을 남기기도 했는데, 대개는 혹평이나 ‘옥에 티’를 지적하는 글이었다. <더스트>와 <내 눈 속의 빛>에 대한 혹평이 많았는데, <더스트>에 대한 분노 섞인 감상평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황금사자상 개수도 늘었는데, 밀코 만체프스키(<더스트>의 감독)에게도 하나 줘야 한다. 가능하면 살아 있는 사자로.” 지난 3년 동안 베니스 본선에 진출한 세편의 한국영화, <거짓말> <섬> <수취인불명>을 모두 본 듯한 누군가는 “한국사람들은 정상적인 성생활을 하지 않는 모양이다”라는 낙서를 남겼다.

‘아시아 3연패’, 한국영화들도 좋은 평 얻어

미라 네어가 황금사자상을 수상함으로써, 장이모의 <책상서랍 속의 동화>, 자파르 파나히의 <순환>에 이어 ‘아시아 3연패’ 기록을 세웠다. 아시아 신드롬에 한국영화가 한몫했다는 것도 반가운 일이다. 일본영화와 중국영화가 부진했던 가운데, 한국은 ‘베네치아 58’부문에 김기덕 감독의 <수취인불명>, ‘새로운 영화’부문에 송일곤 감독, 그리고 단편부문에 <숨바꼭질>의 권일순 감독, <노을소리>의 홍두현 감독, 의 장뤼 감독이 리도행 초청장을 받았고 좋은 반응을 얻었다. <수취인불명>은 경쟁작 20편 중에서 중상 이상의 평가를 얻어냈다. 김기덕 감독은 약 30개 매체와 인터뷰를 했는데, 이중 이탈리아의 기자 겸 평론가인 마시모 카우소는 “개인적으로 황금사자상감이라고 생각하는 작품”이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송일곤 감독의 <꽃섬>은 비록 비공식적인 상이긴 하지만, 젊은 관객이 뽑은 작품상을 받는 등 현지 관객과의 소통에 성공했고, 그로써 만족스런 신고식을 치렀다.

베니스영화제 관계자들은 올해 대내적으로 많은 애를 먹은 듯했다. 어떤 이유인지, 개막식 때 자리를 텅 비웠던 정치가들이 폐막식에는 대거 참석했다. 공식 의장대의 호위를 받으며 행사장에 나타난 카를로 아젤로 참피 대통령은 여우주연상 시상자로 잔 모로가 나오자 가장 먼저 일어나 기립박수를 이끌기도 했다. 더 재미난 사건은, 개막 전후에 “비엔날레가 죽어가고 있다”며 알베르토 바르베라 집행위원장을 집중공격한 바 있는 문화평론가이자 문화관리국 부국장 비토리오 지가르비가 대통령을 따라 폐막식장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영화제에 대한 그의 악담을 기억하는 관중은 ‘분위기 망친다’는 뜻에선지, 그를 향해 일제히 야유를 보냈다. 이는 이탈리아 정계와 베니스영화제의, 언제 깨어질지 모를 위태로운 관계를 드러낸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몇달 전 베를르수코니의 보수파연합이 의회를 장악한 뒤로, 골수좌파인 알베르토 바르베라 집행위원장이 이끄는 베니스영화제를 바라보는 정계의 눈이 곱지 않다는 것이다. 바르베라의 임기가 만료되는 내년, 베니스영화제는 새로운 선장을 맞아, 다시 어떤 길을 가야 할지 고심해야 할 것이다.

베니스영화제가 막을 내렸고 수상자에게는 트로피가 남았다. 관객에게는 영화가 남는 법이지만, 오래 부여잡고픈 영화의 추억이 없다는 게 아쉽다. 베니스에서 서울로 날아온 바로 그 다음날,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이 무너졌다.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도 베니스영화제가 빨리 잊혀질 것 같다.박은영 cinepark@hani.co.kr

수상결과

황금사자상: <몬순 웨딩> 미라 네어

심사위원 대상: <한여름> 울리히 자이들

감독상: 바바크 파야미 <비밀투표>

각본상: 알폰소 쿠아론, 카를로스 쿠아론 <너의 엄마도 역시>

남우주연상: 루이지 로 카스치오 <내 눈 속의 빛>

여우주연상: 산드라 세차렐리 <내 눈 속의 빛>

신인배우상: 가엘 가르시아, 디에고 루나 <너의 엄마도 역시>

올해의 사자상: <시간의 고용자들> 로랑 캉테

심사위원 특별상(현재의 영화): <해물> 주원

미래의 사자상: <빵과 우유> 얀 츠비츠코비츠

은사자상(단편영화): <천재소년> 얀 크루거

평생공로 황금사자상: 에릭 로메르

▶ 수상작은 예상 밖, 거장은 부진한 나른한 축제

▶ 평생공로상 수상한 에릭 로메르 인터뷰

▶ 베니스의 선택 - 미라 네어의 <몬순 웨딩>과 울리히 자이들의 <한여름>

▶ <몬순 웨딩> 감독 미라 네어 인터뷰

▶ <한여름> 감독 울리히 자이들 인터뷰

▶ 아시아의 신예들 - <비밀투표>의 바바크 파야미와 <해물>의 주원

▶ <비밀투표> 감독 바바크 파야미 인터뷰

▶ 유럽 사회파의 오늘 <네비게이터>의 켄 로치와 <시간의 고용자들>의 로랑 캉테

▶ <시간의 고용자들> 감독 로랑 캉테 인터뷰

▶ <네비게이터> 감독 켄 로치 인터뷰

▶ 남미의 정체성 월터 살레스의 <태양 저편에>와 알폰소 쿠아론의 <너의 엄마도 마찬가지>

▶ <태양 저편에> 감독 월터 살레스 인터뷰

▶ <너의 엄마도 마찬가지> 감독 알폰소 쿠아론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