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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넘치는 남성영화 속 가짜 눈물의 공포, 그 기원과 문제점

소년은 울지 않는다, 그러나 아저씨는 운다

올해의 한국영화에는 남성들이 넘쳐난다. 남자들끼리 만나서 ‘짝패’를 이루기도 하고, ‘폭력써클’도 만들더니 ‘뚝방전설’을 남기고, ‘거룩한 계보’까지 생성한다. 그렇게 냉혹한 생존의 룰이 지배하는 스크린 속의 ‘비열한 거리’는 ‘열혈남아’들로 가득 채워졌다. 이런 일련의 영화들을 지켜보고 있자면, 한국의 남성들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면 어떤 식으로든 조직과 연루되어 자신의 힘을 폭력을 통해 전시하고, 자신이 보호해야 하는 가치나 대상을 위해 죽음을 불사해야만 할 것 같다. 그들의 신상명세에 공통적으로 기입되는 직업명은 조직폭력배, 혹은 좀더 전통적이고 서정적인 아우라를 갖는 ‘건달’이다. 영화 속의 이런 직업 편중화 현상을 우리는 청년 실업률이 최고치에 달하고,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된 대한민국의 절망적인 현재에 그린 초상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무한복제되는 두 가지 기원, <친구>와 <파이란>

조폭영화의 기폭제가 되었던 2001년 <친구>의 폭발적인 흥행은 매우 문제적인 것이었다. 우선 <친구>의 엄청난 관객 동원력은 영화계의 메인 타깃이었던 20대 여성 관객 외에도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잠재적인 남성 관객이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해주었다. 영화가 여성의 전유물이라고 생각되는(이성애자인 여성들의 사랑은 남성의 자리를 마련해두는데, 이상하게도 사랑을 다룬 멜로드라마는 여성 관객에게만 지지를 받는다) 사랑에만 매달리지 않는다면, 남자들도 충분히 스크린을 응시할 용의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또 영화가 공간적으로 서울을 벗어나 지역색을 마음껏 분출해도 전국적인 호응을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이 영화 이후로 우리 영화계에는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그리고 제주도까지 온갖 지역 사투리의 향연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친구>는 이데올로기적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두 층위의 영화적 변두리들을 중심으로 끌어내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이 작품을 필두로 한국영화는 ‘조폭영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갖게 되었고, 관객은 매년 무수한 조직원들과 조우해야 하는 사태에 빠지게 되었다.

<친구>

<파이란>

2001년에는 현재 남성영화 캐릭터의 또 다른 밑그림을 형성하는 새로운 스타일의 건달을 만날 수 있었다. 바로 <파이란>의 강재다. 최민식이 열연한 강재는 돈도 없고 힘도 없는 삼류 건달의 캐릭터를 사실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관객의 심금을 울렸다. 물론 그의 삶이 더욱더 비극적으로 비쳐진 데는 말도 안 통하는 이국땅에서 고생만 실컷 하다가 죽어간 ‘파이란’(장백지)의 희생이 상당히 큰 역할을 했다. 끝도 안 보이는 절망의 나락에 빠진 한 남자의 인생이 한 여성의 죽음을 통해 사랑의 숭고함을 배우고 삶의 진실성을 회복해간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사랑만 주었던, 순결한 여성의 죽음은 인생의 선택들에 대해 숙고하지 않으며, 자기 삶의 비천함을 인식하지 않으려 했던 남성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생에 대한 욕망을 일깨우고 분노의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친구>가 보여주었던 남성들만의 끈끈한 무엇, 또 <파이란>에서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비루한 현실을 순응하는 남성을 일깨우기 위해 가련히 희생되는 여성. 그리고 두 영화에 공통적으로 걸쳐 있는 공간적, 계층적 변두리의 정서. 이미 5년 전에 만들어진 두개의 공인된 플롯은 무한한 자기 복제를 통해 오늘날의 남성영화의 확고부동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런 영화들은 이제 더이상 관객의 시선을 폭발적으로 사로잡지도, 그렇다고 자기 비판을 통해 발전적인 변이를 보이지도 않는 정체 상태에 빠져 있는 것 같다. 그런데도 한국영화 속 남성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도 좋은 것일까.

눈물은 자기 합리화의 최고 무기

눈물은 사람의 마음을 약하게 만든다. 특히 눈물이 허용되지 않는 강인해야만 하는 존재들이 흘리는 눈물은 그 존재의 막다른 상황과 절망어린 마음의 핍진한 정서를 표출하는 것 같아 더 그렇다. 남자는 울면 안 된다는 말도 안 되는 교육의 효과 때문에 성숙한 남자와 눈물의 조합은 묘한 감정적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그래서인지 어느 때부터인지 브라운관과 스크린 위에는 남자의 눈물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눈물은 미소년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조각 같은 얼굴에 촉촉한 눈망울이 더해졌을 때 시각적 효과와 정서적 반향이 극대화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소년들은 아름다움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기에 여성성을 내재한, 또는 여성적 영역에 가까운 존재로 여겨지면서 눈물의 충격효과는 점층적으로 감소하게 되었다. 그러자 이제 일명 ‘훈남’이라고 불리는, 보편적 외모의 아저씨들이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처지에 공감과 이해를 보내달라고 호소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남성들이 우글거리는 ‘조직’에도 눈물이 범람하기 시작했다.

가장 최근에 스크린 위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린 아저씨로 <열혈남아>의 재문(설경구)을 들 수 있다. 조직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엉뚱한 사람한테 칼을 꽂는 바람에 죽은 친구의 원수를 갚기 위해 벌교로 잠입한 재문은 애착이 가지 않는 건달이다. 어린아이들 앞에서 부하를 처참하게 짓밟고, 꼬마들이 진흙탕에 처박힌 차를 미느라 진땀을 빼도 대충 미는 시늉만 한다. 그런 그에게도 진심은 있고, 억울한 사연이 있다. 그것은 그가 죽으면서 흘리는 마지막 눈물 속에 응축되어 있다. 감독은 관객이 행여 눈물의 의미를 알아채지 못할까봐 그의 새로운 엄마 점심(나문희)의 입을 통해 “뭐가 그리 서러워서 이렇게 눈물을 흘리냐”고 콕 짚어주는 친절함을 발휘한다. 재문의 눈물은 세상에 대한 항변이자, 비열한 자기 존재에 대한 변명이다. 이런 눈물은 <거룩한 계보>의 남자들에게도 흐른다. 화면을 가득 메운 동치성(정재영)과 그의 친구들의 애절한 얼굴 위로 흐르는 눈물은 재문의 눈물과 동일한 기의를 담고 있다.

그들이 흘리는 눈물은 그들이 택한 인생의 항로를 합리화한다. 사람들 등에 칼 꽂으면서 조직에 몸담고 살아왔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생결단>에서 “그러다보니 지가 할 게 뭐가 있었겠노”라는 상도 삼촌의 대사 속에 녹아 있는 정서이며, 조직의 남자들을 합리화하는 보편적 논리이다. 그들의 눈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안에는 가장 인간다운 정서가 죽지 않고 남아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하층민이라는 그들의 태생적 조건, 부양해야 할 가족까지 더해지면 그들의 눈물은, 그 상황에 처해보지 못한 이들은 쉽사리 비난할 수 없는 어떤 삶의 조건들을 응축하는 것처럼 보인다. 폭력을 생계수단으로 삼는 이들은 분명 더 약한 이의 삶을 억압하고, 그들의 행복을 강탈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영위해왔을 것이 분명한데, 이 눈물 한 방울로 스스로를 ‘어느 연약한 짐승’으로 만든다.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간극들을 무화시키며 사회적 약자라는 거대한 테두리 속으로 자신의 존재를 안착시키려 하는 것이다.

<피터팬의 공식>

<천하장사 마돈나>

스스로에 대한 동정을 갈망하면서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이런 어른들의 태도는 올해 나온 몇편의 성장영화에서 담담했던 소년들이 사는 방식과 대조를 이룬다. <피터팬의 공식>의 한수(온주완), <내 청춘에게 고함>에서의 세 청춘들 그리고 <천하장사 마돈나>의 오동구(류덕환). 그들이 동시대의 폭력성을 견뎌내는 방식은 앞서의 어른들처럼 억울함을 호소하며 스스로 눈물을 짜내며 관객에게 공감이나 연민을 강요하는 태도와는 사뭇 다르다. 소년들은 절망 속에서 불가항력의 법칙에 저항하며 존재의 윤리를 확보하려 애쓰는 동안 왜 아저씨들은 자꾸 삶의 건강성을 애초부터 포기하며 퇴행하기만 하는 것일까.

도덕성의 마지막 보루, 여성들

<진짜 눈물의 공포>에서 지젝은 실존 인물에 밀착해 그 삶의 실재성을 담아내는 순간 포르노그래피적 선정성으로 빠져들게 된다는 사실 때문에 키에슬로프스키가 다큐멘터리에서 극영화로 전환하게 되었다고 분석한다. 키에슬로프스키는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면서 타인이 눈물을 흘리는 내밀한 순간에 허락도 없이 파고드는 외설성을 견디지 못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는 ‘실제’ 삶의 내밀한 순간들을 허구의 이미지들로 돌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작된 이미지들은 스스로 그것이 조작된 장(場) 안에 있음을 공표할 때 가장 덜 위험해진다. 그 장 안에는 ‘이것은 현실이 아니야 허구일 뿐이야’라는 공통의 규약이 존재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조폭영화들의 위험성은 반대로 원래 자신이 속했던 누아르로부터 탈피하여 자꾸 진정성을 주장하며 우리의 현실 속으로 파고들려고 하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 누아르의 규칙 속에서 움직이는 건달들이 추구하는 진정성은 ‘게임의 법칙’ 안에 있으므로 일반인의 현실과 곧바로 접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조폭영화가 누아르와 결별하는 결정적인 지점은 여성을 형상화하는 방식이다. 누아르 속의 전형적 여성들은 사악하게 남성을 조종하며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팜므 파탈’이다. ‘팜므 파탈’은 현실 속의 여성과 결별한 허구적 아이콘이므로, 관객은 그녀에게 감정을 이입하거나 동정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한국 조폭영화는 ‘팜므 파탈’의 자리를 어머니와 누이 혹은 애인으로 채우려고 한다. <열혈남아>는 어머니를, <해바라기>는 어머니와 누이를, <비열한 거리>는 어머니와 누이와 애인을 동시에 볼모로 잡고 있다. 그녀들은 자꾸 조직 속의 남자들에게 건강한 삶을 환기시키며, 그것으로 복귀할 것을 이야기한다. 성적 이미지가 결락된, 어머니와 누이들 그리고 애인들은 일반적, 사회적 규범을 저버린 조직의 남성들이 지켜내야 할 도덕성의 마지막 보루 역할을 한다. 그녀들은 비현실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대신 따듯한 정과 순결한 마음으로 남자를 감동시킨다. 건달들이 이런 여성들을 지켜내고 그녀들이 표상하는 세계와 합일되기를 갈망하면서 조폭영화는 누아르와 결별하고, 멜로드라마와 결탁한다.

어쩔 수 없이 나빠진 남자?

이처럼 한국 조폭영화는 관객의 두 가지 취약점을 공략함으로써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는 남성 주인공 스스로 갖는 변두리성이요, 다른 하나는 연약한 여성들이다. 전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힘없는 하층민의 그것과 자꾸 동일시하면서, 자신의 삶의 방식을 옹호하고 이해를 갈구한다. 후자는 절대로 훼손되어서는 안 되는 어떤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 그가 택하는 폭력이 불가피한 선택임을 설득하면서, 윤리적 비난을 회피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즉 지독하게 현실적인 공간 속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조폭들은 자신들의 눈물을 곧바로 하층민의 비애로 치환하려 하고, 자신이 휘두르는 폭력을 여성을 제물삼아 합리화한다. 나쁜 남자들이 스크린을 활보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나쁜 남자들이 계급과 여성을 볼모로 삼아 자꾸만 자신을 알고 보면 좋은 남자, 어쩔 수 없이 나빠진 불쌍한 남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나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