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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즘을 넘어 인류학적 진실을 향해
2001-09-21

아시아의 신예들 <비밀투표>의 바바크 파야미와 <해물>의 주원

아시아가 세계영화의 변방에 머물던 것도 이제 태곳적 얘기다. 기타노 다케시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은 영화제답게 베니스는 올해도 아시아 작가 발굴에 힘을 쏟았다. 최근 몇년 동안 금사자상의 주인이 아시아감독이었기 때문인지, 영화제를 찾은 서구 언론들도 아시아영화의 상영장마다 떼지어 몰려드는 등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김기덕 감독과 프루트 챈은 ‘2년 연속 경쟁부문에 진출한 아시아감독’이라는 묶음으로 종종 비교가 됐고, 인도 영화사상 초유의 제작비가 투입됐다는 서사극 <아소카>는 수입·배급 관계자들 사이에 ‘베니스에서 꼭 봐야 할 영화’라는 입소문이 나기도 했다.

서구관객의 눈에 거칠고 생경한 이미지로 다가간 <할리우드 홍콩>이나 <아소카>처럼 베니스를 떠들썩하게 한 영화들이 있었던 반면, 이란의 <비밀투표>와 중국의 <해산물>처럼 특정한 사회적 현실을 다루면서도, 다국적 평단과 관객에게 조용한 공감대를 불러일으킨 영화도 있었다. <비밀투표>는 바바크 파야미의 두 번째 영화고, <해물>은 주원은 첫 번째 영화다. 이란과 중국영화계의 차세대 주자라는 버거운 짐을 걸머질 만큼 야문 어깨를 지닌 신예들의 발견은 올 베니스가 거둔 귀한 수확 중 하나다.

<비밀투표>, 믿음과 소통에 관한 우화

바바크 파야미는 이란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캐나다에서 성장하고 영화를 공부한 ‘유학파’ 감독이다. 서구 문물을 접하고 자랐지만, 마음의 고향은 언제나 이란이었다고 말하는 그는 본격적인 영화 활동을 시작하기 위해 이란으로 이주했고, 지난해 데뷔작 <하루 더>를 세상에 내놓았다. 베를린영화제 포럼부문에 초청되는 등 첫 작품부터 국제 평단의 주목을 받은 그는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다큐멘터리 <민주주의의 실험>에서 두 번째 영화의 영감을 얻었다. 보트에 타고 있던 마흐말바프에게 투표를 권하기 위해 투표함을 든 여자가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는 장면에서 영감을 얻어 ‘투표하는 날’에 관한 영화 <비밀투표>를 만들기로 했다고. <비밀투표>를 이끌어가는 인물은 투표 진행을 대행하는 소녀와 투표함 호위의 임무를 맡은 병사다. 이들의 동행은 ‘여자’의 리드를 원치 않는 병사의 반항으로 처음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소녀는 민주주의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이상주의자고, 병사는 총칼의 힘을 신봉하는 군국주의자다. 이들의 마찰도 잠시, 소녀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자신의 믿음을 전하려 하지만, 산 넘어 산이다. 여자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며 아내‘들’의 투표를 막는 남편, 자신의 표를 받을 자격이 있는 건 신뿐이라고 우기는 노인, 물건을 팔아주지 않으면 투표하지 않겠다는 상인 등 사람들은 그들이 믿는 가치 밖으로 한발짝도 나오려들지 않는다. 마감시간에 임박해 돌아가는 길에 병사와 소녀를 태운 차는 고장난 신호등이 서 있는 사막 한가운데서 멈춰 선다. “법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저 신호도 지켜야 한다. 법 때문에 종일 고생했는데, 이제 와서 법을 깨란 말이냐”는 것이 병사의 그럴싸한 항변. 병사는 투표 용지에 소녀의 이름을 적고, 투표함을 안은 소녀는 비행기를 타고 사라진다.

집요하게 이란사회의 리얼리티를 읽어내려는 기자단 앞에서 바바크 파야미는 “이건 이란의 선거 시스템에 관한 리얼리즘영화가 아니”라며 여러 번 손사래를 쳐야 했다. 사실 바바크 파야미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일 가제티노>의 평처럼 “기존 이란영화의 네오리얼리즘의 흐름에서 이탈”한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 보였다는 점이다. 특정 대목에 방점을 찍지 않는 구성은 돌연 마주치는 초현실적인 상황도 자연스럽게 끌어안는다. 실제로 투표함이 하늘에서 떨어진다거나 사막 한가운데 신호등이 서 있다거나 하는 식의 에피소드들은 다소 황당하고, 사막과 바다가 면해 있는 공간 역시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감독은 이란사회의 실상에 관한 리얼한 보고서를 쓰는 대신에, 비현실적인 공간에 현실적인 캐릭터들을 배치해 믿음과 소통에 관한 한편의 우화를 지어낸 것이다.

언어와 문화와 종교의 다양성이 공존하는 이란사회를 하나의 소우주를 보는 그는 ‘통합’이나 ‘계몽’ 대신에 ‘공존’과 ‘소통’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관객과의 ‘소통’에도 성공한다. <비밀투표>는 데일리 평점에서 한동안 선두를 달렸고, 를 비롯한 현지 언론 매체 3곳에서 ‘황금사자상감’이라는 극찬을 듣기도 했다.

<해산물>, 중국영화의 현재

장이모와 장위엔이 금사자상과 은사자상을 휩쓴 2년 전과 비교하면, 올 베니스영화제 라인업에서 중국영화의 존재는 미미했다. 그래서 장위엔에게 은사자상을 선사한 의 시나리오 작가 주원의 감독 데뷔작 <해물>이 뒤늦게 ‘현재의 영화’부문에 도착했다는 사실은 중국영화의 오늘을 궁금해하는 관객에게 더없는 희소식이었다. 지각생 주원은 그에게 쏟아지는 기대에 화답하듯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을 유감없이 펼쳐보였다. <해물>은 자살을 기도하는 창녀와 그녀를 착취하려는 경찰의 관계를 통해 중국사회의 폐부를 드러내고 있다. 경찰은 끝없이 자살을 꿈꾸는 창녀를 끌고 음식점으로 가 해물요리를 주문하며 이렇게 일침한다. “해물을 먹는 사람은 자살을 생각하는 법이 없다. 첫째, 해물을 맛보면 또 먹고 싶어서 죽을 생각을 못하니까. 둘째, 해물을 먹는 사람은 경제적으로 풍족하니까 죽을 이유가 없다. 셋째, 해물을 좋아하는 사람은 성욕이 강하기 때문에 죽지 않는다.” 자살의 유혹에서 창녀를 구하려던 경찰의 선의는 가학과 착취 욕구로 돌변하고, 창녀는 경찰을 죽여버린 뒤에야 전에 없던 생의 의욕과 집착을 갖게 된다. 동료 창녀의 성기에 꽂힌 화대를 뽑아내 씻어 말린 뒤 그녀는 그것이 위조지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해물이나 사먹을 양으로 이리저리 시장을 떠돈다.

주원은 작가로서 이미 스타였다. 첫 번째 시나리오 <우산의 비구름>은 장밍이 연출했는데, 이 작품은 부산영화제 등에서 수상하며 크게 주목받았다. 두 번째 시나리오가 장위엔의 . 세 번째 시나리오 <해산물>을 쓰면서 주원은 감독 데뷔를 꿈꿨고 디지털카메라를 잡았다. 그가 영화의 배경으로 택한 북대하는 마오쩌둥이 극찬한 뒤로 중국 정부의 과잉보호를 받아왔다는 관광 명소로 정치·사회적 함의를 갖는 동시에, 삶의 활력과 죽음의 그늘이 엇갈리는 기이한 공간. 주원은 매년 겨울 자살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 젊은이들이 많다는 소식을 접하기 전, 관광차 북대하를 찾았을 때 바다를 바라보며 불현듯 자살 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떠올린 삶과 죽음, 가학과 피학, 종속과 자유, 그 아이러니에 관한 영화가 바로 <해산물>이었다. 이 영화가 중국에 공개될 리는 만무하다. 주원은 현재의 영화부문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수십개 국제상과 국제 언론의 찬사가 있다고 해도, 중국에서 내 영화가 상영될 가능성은 미지수고, 그것은 불행스런 일”이라며 유감을 표시했다.

박은영 cine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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