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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는 일상에 어떤 무늬를 남겼나
2001-09-21

유럽 사회파의 오늘 <네비게이터>의 켄 로치와 <시간의 고용자들>의 로랑 캉테

현지 언론들은 이번 베니스영화제 출품작 가운데 영국 켄 로치의 <네비게이터>와 프랑스 로랑 캉테의 <시간의 고용자들> 두편을 ‘사회파 영화’라는 타이틀로 한데 묶어 보도하는 일이 잦았다. 충분히 그럴 만했다. 민영화된 철도회사 노동자들의 수난을 다룬 <네비게이터>나, 고액 연봉을 받다가 해고된 전직 컨설턴트의 내면세계를 좇아간 <시간의 고용자들>은 모두 신자유주의 질서가 개인 일상에 어떻게 파급되는지를 적극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노동현장으로 뛰어든 두사람

꼭 이 두 영화만이 아니라 켄 로치와 로랑 캉테는 여러 가지 면에서 비교해볼 만하다. 노조가 무기력해지고, 노동자의 계급적 자존심이 흔적없이 사라진 90년대 중반 이후로 장편 극영화에서 노동현장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이는 이 둘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65살의 켄 로치는 영화를 시작한 60년대부터 노동자의 편에서 노동자를 다룬 영화를 찍어왔고, 최근까지도 변함없이 칸이나 베니스영화제에 노동자의 깃발을 들고 나타났다. 그의 투쟁이 갈수록 외로워보이던 99년 당시 38살의 로랑 캉테가 장편 데뷔작 <인력자원부>를 발표했다. 당시 프랑스에서 논란이 됐던 주 35시간 노동제를 둘러싸고, 이 제도를 도입하면서 사업부 폐지를 함께 밀어붙이려는 경영자와 이에 맞서지만 힘이 부치는 노동자의 변화된 역관계를 정교하게 파헤친 영화였다. 소재뿐 아니라, 전문배우를 쓰지 않은 것도 켄 로치와 유사했다.

경영학을 전공하면서 아버지가 다니는 공장에 실습을 나온 대학생 아들이, 35시간 노동제를 지지해 사용자 편에서 노조를 설득하다가 사태가 달리 전개됨을 알고서 노조와 함께 파업을 주도한다. 그 아들이, 자신이 경영자로 성공하기를 바라며 파업에 불참한 채 선반을 돌리는 아버지에게 격렬한 비난을 퍼붓는 장면은 한 시대 한 계급의 긍지가 안팎에서 함께 무너져버렸음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캉테는 로치와 분명 같은 편이었지만, 로치와 달리 이념이나 노동의 신성함 따위의 명제에 연연해하지 않는 냉정한 리얼리스트였고 프랑스 평단은 열띤 지지를 보냈다. 이번 베니스영화제의 경쟁부문인 ‘베네치아 58’에 켄 로치가, 이와 별도로 신설된 경쟁부문 ‘현재의 영화’에 로랑 캉테가 나란히 작품을 낸 건 이렇다 할 화제가 없던 이번 영화제에서 충분히 관심을 끌 만했던 것이다.

<시간의 고용자들>, 21세기판 <세일즈맨의 죽음>

<네비게이터>는 로치가 문제가 막 발생한 현장을 쫓아가는 시의성 높은 감독임을 또 한번 입증했다. 영국의 국영탄광 무더기 폐쇄조처가 내려진 지 얼마 안 된 93년에는 탄광촌의 실직 노동자를 쫓았고(레이닝 스톤), 99년 칸영화제에 냈던 <빵과 장미>에서는 미국에서 문제가 되던 남미의 불법체류 노동자들을 다뤘다. <네비게이터>는 지난해 있었던 영국 열차충돌 참사의 한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다시 논란이 됐던 영국 철도회사 민영화에 초점을 맞춘다. 민영화 조처로 철도보수와 안전점검을 담당하던 남부 요크서 지방 철도회사의 한 부서가 둘로 쪼개져 각지 다른 민영회사로 넘어가게 된다. 새 회사는 성과급 도입과 노조 탈퇴를 요구한다.

아이들을 함께 키우고 옷과 음식도 나눠가지다시피 해온 이 부서원들은 변화된 상황 앞에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저마다의 적응을 시도하지만 상당수가 회사를 떠나 일용직 노동자로 전락해간다. 철도 노동자로 17년간 일하다가 해고당한 로브 다우버가 시나리오를 썼고, 그는 애석하게도 영화의 개봉을 보지 못하고 철도 노동에서 얻은 직업병으로 세상을 떴다. 로치는 목소리를 낮추는 대신 노동자 개개인의 애환을 쫓으면서 대사에 유머를 듬뿍 섞고 재즈와 블루스 음악을 곁들였다. 그 결과 현지 언론에서 황금사자상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됐지만 막상 상을 받지는 못했다.

이와 달리 로랑 캉테는 두 번째 영화 <시간의 고용자들>로 ‘현재의 영화’부문 그랑프리인 올해의 사자상을 거머쥐었다. 신설된 부문이어서 이 상의 권위를 헤아리기 힘들지만, 베니스영화제가 야심차게 기획한 부문인 만큼 캉테가 국제적인 명망가 감독 대열에 당당하게 들어선 건 틀림없어 보인다. 경영컨설팅을 해온 빈센트는 회사에서 해고당한 뒤에 가족에게 그 사실을 숨기고는 차를 타고 이곳 저곳 헤매다 밤이 되면 시간에 맞춰 귀가한다. 얼마 지나 그는 저개발국에 투자하는 유엔기구로 직장을 옮겼다고 가족에게 거짓말을 치고, 친구들로부터 별도의 사설펀드를 만들겠다며 돈을 모은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밀수에 관여하기까지 한다.

이런 행각의 출발점은 직장과 가정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욕구였지만, 막상 떠나기에는 그를 붙잡아 매온 끈들이 너무 질기다. 아내에게 거짓 전화를 계속 해대는 빈센트에게서, 굴레가 돼버리고 만 가족의 이중적 모습이 섬뜩하게 드러나지만 막상 빈센트는 제자리로 돌아와 다른 컨설팅 회사에 취직하고 영화는 거기서 끝난다. 간결한 대사, 차가운 블루톤의 화면과 함께 이 영화는 계급과 시대를 바꾸면서 훨씬 냉정해진 21세기판 <세일즈맨의 죽음>처럼 다가온다

임범/ 한겨레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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