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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99:더불어 사는 집 이야기>의 이현정 감독
이영진 사진 이혜정 2006-12-06

거리에서 죽어가는 도시빈민의 잔인한 기록

“굶는 아이의 아빠는 남아도는 빵을 훔칠 권리가 있다.” 빈민운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베 피에르 신부의 말이다. 눈물겨운 부정(父情) 앞에서 도덕률은 한낱 종잇조각에 불과하다고? 신부의 말을 오해해선 안 된다. 도둑질을 권리라고까지 못박지 않는가. 이때의 도둑질은 용서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성직자가 하늘이 내린 계율을 어기고 땅의 악행을 부추기는 건 다른 이유에서다. 한쪽은 굶고, 한쪽은 남아돌다니. 잉여에 대한 분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사회, 배고픈 자는 스스로를 구해야 한다. 그게 마땅하다고 일갈하는 것이다. “빈곤층의 주거문제에 대한 사회와 정부의 무관심을 환기시키고 빈민 스스가 해결책을 찾는” 이른바 스쾃(squat: 점거) 운동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남미와 유럽에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스쾃운동은 한국에도 있다. 이현정 감독의 <192-339:더불어 사는 집 이야기>는 한국의 ‘빈민’들이 벌인 ‘최초의’ 스쾃운동에 관한 다큐멘터리다. 알코올에 젖어살던 노숙인들이 2005년 5월, 철거가 예정된 청계천의 삼일아파트를 ‘불법으로’ 취한다. 한 빈민활동가의 독려로 노숙인들은 삼일아파트를 아지트 삼아 ‘더불어 사는 집’이라는 단체를 꾸리고, 매주 월요일마다 노숙인들에게 무료급식을 하며 자활 의지를 나눈다. 청계천 8가에 비어 있는 공터를 점유해 노점까지 꾸민 이들은 삼일아파트 철거가 다가오자 “서울시가 저소득층을 위한 임대주택사업의 일환으로 매입했으나” 아무도 살지 않는 정릉동 192-339번지 다세대 주택에 침투해 새 둥지를 마련한다.

2004년 8월, 일군의 문화예술인들이 “시민에게 문화를, 예술인에게 작업실을”이라고 외치며 서울 목동 예술인회관을 점거하는 것을 보면서 자극을 받았다는 이현정 감독은 생존의 요구가 절박한 빈민들의 스쾃운동은 어떻게 이뤄질까 하는 궁금증에 ‘더불어 사는 집’을 찾았다. 언론에 이미 많이 노출됐고, 아저씨들의 공동체에 다가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비어 있는 집을 좀 쓰면 어떤가.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운동보다 사회적 동의를 얻기가 쉬운 듯했다. 유럽에서는 시에서 집을 사서 내줄 정도이고. 한국사회의 소유에 대한 강박을 약화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이상적인 대안가족의 형태를 엿볼 수 있을지 않을까. 그런 기대도 있었다. 뭣보다 내가 도시빈민이다.”

과연 빈민들의 첫 번째 미래찾기 실험은 성공적이었을까. <192-339:…>는 노숙인들의 전사(前史)를 줄줄이 읊어대며 자활 시도만을 부각하는 방송다큐와 다르다. 시청과 동사무서를 상대로 거주지 확보투쟁을 벌여나가는 와중에 실질적으로 ‘더불어 사는 집’을 이끄는 빈민활동가는 “전투적으로 각을 세우고 싸워야 한다”고 다그치고, 머뭇거리던 노숙인들은 “투쟁의 소모품이 되기 싫다”며 애써 만든 둥지를 하나둘 떠난다. “방 청소한 다음에 촬영하라”고 농을 걸던 이들이었지만, 나중엔 촬영을 거부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그러한 상황까지도 카메라는 묵묵히 고백한다. 기록으로서 <192-339:…>의 미덕은 여기에 있다. 갈등을 숨기려 들지도 않고, 섣불리 개입해 봉합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서울영상집단에 들어간 지 벌써 10년이 됐지만, “게으른데다 한 우물에만 집중하지 못하는 기질 탓에” <변방에서 중심으로>(1997) 조감독 외엔 변변한 일을 한 적 없다는 이현정 감독. 그가 7개월 동안의 ‘나홀로’ 촬영 끝에 첫 번째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내기까지는 곡절이 많았다. “그들이 인권에 대해서 줄기차게 이야기하면서도 가부장적 인식을 버리지 못하고 장애인에 대한 차별 등을 보일 때는 이질감 같은 게 느껴졌다. 동시에 혹시 나도 인권이라는 말을 남발하는 것은 아닐까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촬영하고 나서 분량을 잘 확인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막바지 촬영 때는 카메라 들고 나갔다가 그냥 시내를 빙빙 돌다 돌아온 적도 있다.”

사실 <192-339:…>에는 촬영 당시 불편의 흔적들이 얼룩처럼 남아 있다. 중간에 간간이 나오는 자막들은 차마 감독이 지금도 털어놓을 수 없는 정황들의 증거물들이다. 편집하는 동안 110시간에 달하는 촬영분량을 줄여야 했던 것보다 “촬영 당시의 감정 상태를 떠올려야 했던” 것이 더욱 고통스러웠다. “점거운동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했지만 어쨌든 촬영을 계속하면서 노숙인들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간 것이 사실이다. 특히 후반부에 회계일을 맡아보는 정 선생님과 동환이에게 시선을 주려고 했는데 잘 안 된 것 같다. 가까스로 완성을 했는데 보러오라고 연락할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게 가장 아쉽다. 난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노숙인들은 뭘 얻었을까 걱정되고.”

인디다큐페스티발에서의 상영 이후 주위에서 후반부 애니메이션을 빼라고들 조언하지만, 그 말을 듣지 않는 것도 그런 우려 때문이다. “노숙인들은 거리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 아니다. 거리에서 죽어가는 존재들이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애니메이션 장면을 제하면 집단 내의 갈등만이 더욱 부각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런 후유증 탓일까. 그는 다음 작품은 “10년 뒤에나 만들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당분간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꾸려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부터 다시 시작할 것이라면서. 한때 더불어 살았던 노숙인들이 그에게 새로운 숙제를 던져주고 떠난 것만큼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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