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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 즐거운 기다림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어언 20여년 전 이산가족 찾기는 끝났지만, 오늘도 ‘이산애인’ 찾기의 애절한 노래는 끝나지 않았다. 오늘날 만남의 광장은 KBS 앞이 아니라 인터넷 게시판. 단면 중의 하나, 어느 남성동성애자(게이) 사이트 ‘사람찾기’ 코너에 올라온 애끓는 사연들을 소개함다. “오늘 밤 9시 반쯤에 봉천역에서 5xx9번 타신 분?” 이어서 ‘그분’의 인상착의와 복장묘사가 나오고, “이쪽 분이신 것 같아서요^^;”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라고, 정말로 대책없다고,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고 생각은 들지만 그래도 얼마나 간절했으면. 일상의 남남상열지사가 봉쇄돼 있으니 이렇게 스치는 한번의 눈길도 간절할 수밖에.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고, 한순간의 눈빛에도 영겁의 세월이 스민다고 하지 않던가. 지하철, 사우나, 공항, 헬스클럽, 어디서든 눈빛이 마주쳤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한 미련은 살아서 꿈틀거리고. 소도시의 사우나에서 생긴 일. “이른 아침 목욕하고 나오는데 금테 안경 쓰고 눈 마주친 친구. 잠시 스쳤지만 잊을 수가 없네요.” 이어서 터미널. 길을 물었던 청년에 대한 인상착의를 쓰고 “동포라고 하면서 씩~ 미소를 짓는데… 가슴이 콩닥콩닥… 왠지 이쪽 분 같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부디 그들의 ‘게이다’(게이끼리 서로를 알아보는 레이더)가 정확했기를.

그래도 다음 사연은 만남의 가능성 짙음. “이태원 xxx 클럽에서 별 모양의 금색 목걸이를 했던 분.” 그분을 찾지만, 정작 대답은 ‘딴분’이 하시기 다반사. “내 애인인데.” 사실인지 의심되지만, 그래도 ‘야리는’ 댓글이 아니니 대답도 정중하게 “하하 네 아쉽네요!” 아니나 다를까, 어디서든 시선의 부익부 빈익빈. 어젯밤 클럽에서 내가 찍었던 그놈을 찾는 글을 네가 올리고. 세상은 넓지만, 노는 바닥은 좁다. 게이들이 노는 클럽, 가는 사이트가 ‘다행히’ 뻔하므로, 그나마 ‘사람찾기’의 가능성이 생긴다. 남들이 올린 글을 보면서 웃었던 그들이 올리는 글의 서두는 대개, “제가 이런 글을 쓰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적나라하지만 간절하며, 우스꽝스럽지만 안쓰러우며, 유치하지만 애절하며, 어처구니없지만 서글프다. 애절한 욕망이 들끓는 정신의 풍경, 정말로 구슬픈 연가다. 당연한 물음. 클럽에서 말걸어 보지? 서울의 퀴어마을 청년들 혹은 종족으로서 퀴어(Queer As Folk), 그들의 너무나 한국적인 혹은 동아시아적인 수줍음이 원흉이다. 누군가를 응시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유교문화의 부작용. 그분을 찾는 크루징(Crusing)의 8할은 응시의 기술. 하지만 몸에 달라붙은 관습의 굴레. 친구들과 원형으로 모여서 강강수월래 춤추기, 영원히 테이블에 엉덩이 붙이고 아는 사람과만 얘기하기. 그리하여 만남의 광장은 폐쇄되고, 시선은 원형감옥에 갇히고. 다음날 후회하다 컴퓨터 앞에서 망설이기.

이번엔 자책하기. “그룹 xxx을 좋아했던 일본인을 찾습니다… 받은 건 많은데 해준 건 없어서 미안해요.” 친구로든, 애인으로든 ‘꼭 한번 만나고 싶다’고. 10년도 모자라 15년을 거슬러 올라가 누군가를 불러보기. “6x사단 xx중대 91~92년.” “참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그 친구는 가끔 한번씩 생각이 납니다.” 혹시나 ‘이쪽’이 맞으면 연락을 달라는, 오래된 그리움. 그분과 교환한 ‘전번’을 잃어버렸다는 애절한 사연도 빠지지 않는다. 맞춤법이 틀리고, 외계어투성이지만, 당신의 진심이 뚝뚝 묻어나서 정말로 꼭 만났으면 좋겠다고, 나조차 기도함.

맞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장난스럽게 사람찾기. “XX병원 치과 선생님~ 너무 귀여워요! JJW 선생님~.” 찾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이어지는 댓글놀이. “앗 나 조만간 XX병원 가는데 JJW 선생님 눈여겨봐야지 ㅋ.” 때때로 명품 매장의 야릇한 점원도 입질에 오르고. 이번엔 ‘나에게도 애인 아니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매일 아침 9시30분에 XXX역에서 XXX역쪽으로 걸어간다… 과연 이반(동성애자)이 있을까… 눈인사라도 할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다양한 외로움이 전시되고, 장난인지 정말인지 모를 답글이 달린다. “저요. 전 9시20분 정도 ㅋㅋ.” 선배들의 경험담도 이어지고. “예전에 그런 만남이 있었지 출퇴근시 서로 호감 느끼다 바에서 보고서 1년 정도 만남.” 어쩌다 “왜 이런 글을 올리는 걸까”라는 철학적인 자문자답까지. 어처구니없다가 처연해지는 인생의 ‘희비극’ 혹은 ‘러브 액추얼리’(영화 한편은 거뜬히 나와요).

그리고 텔레비전. <웃찾사> 방청석에서 어여쁜 아가씨가 웃는 모습이 비치고,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TV에서 단 몇초간 당신을 봤지만 며칠을 고민했습니다… 당신을 다시 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공감대 ‘만빵’이었다는 다음 UCC 광고 ‘그 남자의 프러포즈’. 무엇이 다르랴. 광고로 포장된 사람찾기일 뿐. 그 남자의 프러포즈는 아름답고, 그 남자들의 사람찾기는 유치할 이유야 없는 법. 이렇게 ‘후회’하지 않겠다는 합리주의 명분과 ‘우연’을 기대하는 무속적인 기대에 기대서 인간들은 연명한다. 정말로 ‘후회하지 않아’?

마지막으로 개똥철학 하나. 버스는 기다리면 오지만, 사람은 기다린다고 오지 않는다. 오지 않는 님을 기다리는 나름의 방법, 즐겁게 놀면서, 딴짓을 하면서, 딴놈들과 놀아나면서 기다리기. 세상에는 어쩔 수 있는 것과 어쩔 수 없는 것이 있으므로. 어찌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려는 자세, 그것을 할밖에. 사람찾기라도, 달리기라도 하거나. 혹시나 게으른 기다림에 망가진 모습 탓에 그분이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내 탓이오, 내 탓이오…. 이보다 큰 비극이 또 있으랴. (게시판의 사연은 혹시나 몰라서 조금씩 각색했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