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Culture > 초이스 > 도서
찬란했던 공산주의의 마지막, 소녀들의 후일담
2006-12-15

<프라하의 소녀시대> 요네하라 마리 지음/ 마음산책 펴냄

베를린의 벽은 무너졌고, 프라하에는 봄이 왔다. 게다가 그 모든 게 지난 세기의 일이다. TV 오락프로에서는 ‘반공’이라는 말을 몰라서 그 뜻을 문의하는 학생들의 사연이 소개된다. 이런 시대에, 1960년대 초 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에 다니던 초등학생 소녀들의 이야기를 읽는 일은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유고슬라비아라는 국가명이 존재하고, 중국 공산당과 소련 공산당은 부분적 핵실험 정지조약을 두고 삐걱거린다. 유럽 각국의, 혹은 모국의 공산주의에 관련한 화제들은 마치 새로 나온 초콜릿 이름처럼 소녀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프라하의 소녀시대>는 저자 요네하라 마리가 겪은 일을 바탕으로 쓴 논픽션이다. 요네하라 마리는 열 살이던 1960년부터 64년까지 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를 다녔다. 일본인이던 그녀가 프라하에 살게 된 것은 그녀의 아버지가 공산주의 운동 이론지인 <평화와 사회주의 제문제>의 편집위원회 멤버로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평화와 사회주의 제문제>는 세계 각국 공산주의 정당으로서는 유일하게 남은 상설 국제교류기관으로, 요네하라는 그곳에서 근무하는 아버지를 따라온 다른 나라의 소녀들을 만나게 된다. 공부를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는 그리스 출신 리차, 무늬만 루마니아인인 거짓말쟁이 아냐, 유고슬라비아 출신으로 그림에 소질이 있는 야스나가 바로 그들이다. 리차는 “호메로스의 동포라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문학에 젬병이었는데 수학 역시 천재적으로 ‘못했다’. 아냐는 자기 아버지가 루마니아 공산주의의 대명사라도 되는 듯 떠벌렸지만 실은 정권에 기생해 사치를 누리는 집안에서 곱게 커왔다. 야스나는 호쿠사이를 좋아하고 그림 그리기를 사랑했다. 요네하라는 40년의 시간이 흘러 그 친구들을 하나씩 찾아간다. 물어물어, 몇개의 국경을 넘어가며 옛 친구들을 찾는 그녀의 노력은 성과를 거둔다. 이들의 이야기는 오늘로 오면 사뭇 다른 울림을 남긴다.

<프라하의 소녀시대>는 공산주의가 찬란히 빛나던 마지막 시기에 공산주의 국가에서, 공산주의의 이념을 받들어온 소녀들의 이야기이고, 그들의 후일담이다. 이제 와 둘러보는 동구권의 몰락이 안기는 씁쓸함을, 이 책은 비겁하게 비난하지 않고 따뜻하게 응시한다. 변명하는 대신 솔직히 본 것을 들려준다. 사소한 대화나 묘사가 낭비되지 않고 한 개인과 그 사회를 구성한다. 요네하라 마리는 다만, 자신이 겪였던 세계의 일부를 세공해, 탐스럽게 내놓는다. 읽다가 눈물을 흘린다면, 그건 이념이 같아서가 아니라 당신이 인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