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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 미묘함의 묘미
권리(소설가) 2006-12-22

자리가 비좁다. 선배들이 해놓은 것이 너무나 많다. 크리스티 언니는 인간관계에서 발생될 수 있는 범죄의 소재를, 카버 오빠는 일상의 소소한 문제를, 매컬러스 할머니는 섬세한 심리의 물결을 극점까지 파헤쳐놓으셨다. 아직도 남은 틈새란 존재하는 것일까? 인생은 밥그릇 싸움이라고 한 어느 선각자의 말이 떠오른다. 후예에게 남은 것은 아주아주 미묘한 틈새일 따름임을 깨닫는 요즘이다.

언젠가부터 미묘해지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미묘함을 길러주는 학원이 있으면 끊고 싶지만 아직 개척되지 않은 분야라서 독학을 하고 있다. 미묘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미묘함을 알아야 한다. 가끔 재미난 일본영화들은 미묘함의 묘미를 알려준다. 우리가 보통 ‘좋은지 나쁜지 잘 모르겠어’라고 하는 것을 일본인들은 ‘미묘’(微妙)라고 표현한다. 말끝을 올리며 고개를 흔들어줘야지 그 미묘함이 살아난다. 섬세하기로 유명한 일본인들의 성격을 단박에 알려주는 유행어가 아닐 수 없다.

가령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같은 영화는 그 미묘함을 주요 웃음 포인트로 써먹은 예다. 평범하게 반찬을 사는 법, 평범하게 이불을 너는 법 등을 고민하던 주인공은 어느 순간 “평범하게 사는 것은 미묘한 문제다”라는 문제의식에 도달한다. 과연 평범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것? 그럼 비범하다는 것은? 오징어 재킷을 껴입고 닭날개로 나치 문양을 만드는 취미를 가진 것? 그렇다면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오징어 재킷을 입고 닭날개로 장난치는 사람은 평범한가, 비범한가. 자칫 쓸 데없는 질문 같기도 하지만, 라스콜리니코프는 이 주제에 골몰하다 살인을 저지르기도 했다.

나는 살면서 몇몇 미묘한 그룹들을 만났다. A그룹 사람들은 공식적으로 출판되지도 않은 미묘한 책을 돌려보면서 미묘한 소감을 얘기했다. B그룹 사람들은 하루 종일 언어유희를 하면서 극소수만 웃는 것에 즐거워했다. C그룹은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소규모 전시회를 열었고 D그룹은 미묘한 춤을 추며 마리화나를 피워댔으며 E그룹은 미묘한 복장을 하고 나타나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 자신들은 평범한 세상에서 공식적인 지위를 보장받으며 평범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내 눈엔 그들이 너무 독특해서 어떤 인간으로 분류해야 할지 고민스러울 때가 많다. 가끔은 변태, 지식인, 사이코, 행동주의자 등 인간을 표현하는 그 어떤 카테고리에도 끼워두기 힘든 사람들이 있는 법이니까.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 자신만 알고 있는 자신의 독특함을 주인공이 갖고 있음을 깨닫게 되면 대개 발광한다. 자신이 완벽히 외롭지만은 않단 사실을 알게 되고 그래서 외로움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면 금상첨화다. 발자크던가 발작 선생이 말씀하시길, 타인 없이 성격 없다 하셨다. 자신을 정말 모르겠다면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주는 미묘한 타인을 만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리고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밀하게 관찰한 다음, 각자가 상정한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인간’이라면 절대 알아차리지 못할 그의 미묘한 성격을 탐구해보자. 멀쩡해 보이던 사람도 단 몇초 만에 변태로 보일 수도 있다. 그렇게 몇명쯤 관찰하다보면 평범한 인간이 하나도 없으며 그로 인해 훨씬 세상이 재미나단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을 대할 때 이 방법은 특히 유용하다. 근엄하고 교양있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김 부장이 실은 밥을 먹을 때 콩만 골라내는 어린아이라거나, 반찬을 먹을 때 반드시 김치, 국, 나물, 계란순으로 정해서 먹는 결벽증을 갖고 있다든가, 콧구멍 한쪽이 삼각형인 모습 등을 상상해보자. 인간의 미묘함을 알아차리면 세상의 문제는 전보다 27%쯤 가벼워지고 위트는 57%쯤 늘어나며 인생은 79%쯤 재밌어진다. 당신도 꼭 성공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