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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꿉장난 로맨스에 갇혀 폭발하지 않는 박찬욱의 복수

복수 3부작의 여정을 끝낸 박찬욱 감독이 정신병원 환자들의 신세기 사랑법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전에 없이 젊은 주인공들과 밝은 분위기로 구성되어 있는 영화다. 그는 이 영화가 단추 풀고 만든 소품이라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홀가분한 마음으로 만들어진 그의 작품은 어떤 모양새인지 궁금해진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과연 박찬욱 영화의 어디쯤 어떤 의미로 위치해 있는걸까? 변성찬, 남다은, 정한석이 영화에 대해 세가지 비평을 전한다. 이어서, 박찬욱 감독의 꼼꼼한 답변도 함께 실었다.

사랑을 가장한 복수 이야기

‘복수 끝, 사랑 시작!’ 이것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메인 카피이자 기본 정신이다. 영화의 출발점에는 여전히 ‘복수’가 놓여 있지만, 그 복수는 행위로서 완결되지 않으며 알콩달콩한 사랑 이야기로 전이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영화가 끝나는 순간부터 들었던 이 의문은,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짙은 의혹이 된다. 계속해서 내 귀에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복수 영화가 아니다”라는 말이, “내가 욕망하는 것은 어머니가 아니다”라고 하는 강박증적인 화법이자 논리처럼 들린다. 환청… 이러한 집요한 의문과 의혹도 하나의 병이다. 하지만 어쩌랴?, 그 끊임없는 의혹과 뒤집어 읽기의 유혹을 불러일으키는 것, 이것이 바로 그의 영화 세계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 병적인 의혹 끝에 도달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올드보이>가 복수를 가장한 금지된 사랑 이야기였다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사랑을 가장한 복수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복수는 이상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 ‘이상한 방식’, 그것은 박찬욱 영화의 징후이기도 하다.

영군(임수정)은 왜 싸이보그를 꿈꾸는가? 영화를 보는 내내 궁금했고, 그래서 의혹의 첫 출발점이 된 의문이다. 영군은 할머니를 끌고 간 ‘하얀 맨’들에 복수하기 위해서 ‘싸이보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사이보그지? 복수를 위해 힘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면, 세상에 힘있는 것은 무수히 많다. 게다가 영군이 특별히 사이보그 만화나 영화를 즐겼던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다. 그 첫 번째 답변. 그것은 대신 복수를 해주어야 할 할머니가 이미 사이보그였기 때문이다. 그 하얀 맨들이 영군에게 원한의 대상이 된 것은, 단지 할머니를 데려갔기 때문이 아니라, 할머니에게서 틀니를 빼앗은 채 데려갔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쥐 망상은 틀니없이는 행위로서 수행되지 못한다. 할머니는 틀니와 합체가 되어야만 쥐-사이보그가 될 수 있고, 비로소 자신의 세계를 가질 수 있다. 세상(영군의 가족과 하얀 맨)은 그 할머니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잔인하게 파괴했다. 이것이 영군의 복수심과 원한의 출발점이다. 그렇다면 영군이 할머니의 틀니를 끼고 쥐-사이보그가 되어 기계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 그 자체가, 할머니를 대신해서 세상이 부정한 그 세계를 자기 것으로 유지하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세상에 대한 통쾌한 복수일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의 복수는 영군이 병원에 입원한 순간부터 이루어진다. 병원에 감금된 그녀는 하얀 맨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손가락도 움직이고 눈도 깜박거린다. 그러나 영군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굳이 손가락 끝에서 총알이 나오는 전투형 사이보그(靈軍: 영혼을 지닌 군사 로봇) 되기를 욕망한다. 그녀는 남근을 욕망한다(방전 상태에서 총알은 발기부진의 남근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제대로 된 남근이 되기 위해서는, 내면의 장애물부터 극복해야 한다. 바로 할머니의 증상을 낳았던 가부장제의 억압 논리인 ‘7거지악’을 전복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군의 증상-망상은, 할머니의 시집살이 원한의 격세유전인 셈이다(영군의 어머니는 부재하는 아버지를 대신해 이미 남근적 존재가 되어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뿌리 깊은 가부장제의 유산에 정면으로 맞서고자 하는 페미니즘영화인가?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영화에 따르면 영군의 사이보그 망상이 좀더 넓은 사회적 질병의 증상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군의 사이보그 망상을 처음 보게 되는 공간은 전자부품을 조립하는 공장의 작업 라인이다. 짙은 녹색의 공간, 그것은 분명 <복수는 나의 것>의 첫 장면을 환기시킨다. 그녀가 왜 그곳에서 단순 반복적인 기계적 노동을 하고 있어야 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가장 멋진, 어쩌면 유일하게 볼만했던 그 장면에서, 그녀는 그곳에 있었다. 현실과 영화, 실제와 환상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펼쳐지는 그 장면은, 이 영화가 지향하고자 하는 ‘특이한 세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그 압축된 세계는 끝내 펼쳐지지 않은 채 무지갯빛 환상으로 봉인된다. 그 장면은 팀 버튼적인 악마적 세계를 기대하게 하기에 충분했지만, 끝내 영화는 이상한 방식의 복수극으로 끝맺는다. 치유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할머니와 교신 이후 더욱 거대해진 영군의 망상(핵폭발 망상). 그 망상의 세계를 유지하는 것, 그것은 이미 그 자체로 망상의 세계를 잔인하게 파괴시킨 세상에 대한 복수이다.

알콩달콩, 소꿉장난 로맨스에 굳이 어두운 징후의 그림자를 드리워놓는 것, 그리고 역으로 곳곳에 지뢰를 매설해놓고도 결코 폭발시키지 않는 것. 이것은 박찬욱 영화 세계의 이상한 징후이다. 어쨌든 내게 이 영화는 여전히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복수 3부작 중에서도 <복수는 나의 것>을 가장 많이 닮은, 그러면서도 많이 다르기도 한, 일종의 남매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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