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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루덴스, 미학자 진중권

찻잔을 감싼 손가락이 굵고 험했다. 책장을 뒤적이는 인문학자로서는 몹시 투박한 진중권의 손에는 옹이가 박혀 있었다. “어려서부터 목공을 해서 성한 데가 없어요.” 최근에는 메서슈미트 전투기 모델과 애니메이션 <붉은 돼지>에 나오는 비행정 모델을 조립했다. 두드리면 현금 출납기 영수증처럼 좌르륵 출력되는 진중권의 말 속에는 “놀다”라는 동사가 자주, 흔쾌히 끼어들었다. 박정희 정권을 예찬하는 우파 이데올로그들을 필마단기로 논파한 책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1998)부터 진중권의 글은 흥겨운 유희의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알려진 대로 이 책의 제목은 <월간조선> 전 조갑제 편집장이 쓴 박정희 전기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의 일갈을 (파워레인저 포즈로) ‘반사’한 다음 울화통의 느낌표를 보탠 것이다. 진중권은 따로 무기를 구하지 않고 상대가 빗맞힌 돌을 주워서 도로 던졌다. 논리의 로프 반동을 이용해 제풀에 넘어뜨렸다. 피를 토하듯 국가와 민족의 나아갈 바를 외치는 극우 논자들의 ‘숭고한’ 공세에 진중권은 골계의 미학으로 대적했다. 지사적 비장미는 무슨! 상식만 갖고도 충분하다는 투의 논박은, 요컨대 “바보들, 창피한 줄 아세요”에 가까웠다. 그 유유함이 상대를 더욱 기분 나쁘게 한 것은 물론이다. 돌아보면 진중권의 전술은 다만 논리학적으로 불미스러운 사태를 수습하는 것이었다. 국가, 민족,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등의 개념이 오염되고 오용된 사례를 지적하고 앞뒤 틀린 문장에 밑줄을 치면서 그는 물었다. 저들은 그렇게 말함으로써 무엇을 원하는가? 비트겐슈타인의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는 명제를 멋대로 비틀자면, 진중권은 “말할 수 있는 것에 관해서는 귀찮아도 침묵하지 말자”는 태도로 10년가량 논객으로 살았다. 그가 인터넷와 각종 매체에 쏘아올린 시론들은 <시칠리아의 암소>(2000), <폭력과 상스러움>(2002), <빨간 바이러스>(2004)에 묶였고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 <SBS 전망대>로 전파를 탔다. 세론이 담론으로 걸러질 때까지 점잖게 기다리지 않고 오늘의 뉴스를 갑론을박하는 난장에 꼬박꼬박 출석한 그의 글쓰기는, 쇼크와 유머로 대중의 옆구리를 찔러 관성을 뒤흔드는 ‘노가다’였다. “조야하고 물질적인 것들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싸움(중략) 없이는 고상하고 정신적인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발터 벤야민의 의견과 아웃사이더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우연에는 용기를!”이라는 구호가 그를 독려했을 것이다.

진중권은 안티 조선 운동과 진보정당에 일정 시간 참여했고 시효가 다했다고 판단하면 대열에서 이탈했다. 그래서 기회주의와 ‘이적 ’ 혐의로 비판도 받았다. 진중권은 의식과 행동의 준거를 소속 집단에 두는 것이야말로 무원칙한 노릇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그가 즐겨 쓰는 ‘놀이’ 개념이 진정성과 감동의 결핍을 보여준다고 공격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놀이야말로 진지하지 않으면 재미없다고 믿는 진중권에게 그것은 별로 아픈 소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2005)은 <미학 오디세이>로 매력을 입증한 진중권식 글쓰기가 세운 즐거운 유원지다. 이 책의 독자는 가끔 소리내어 읽기도 하고 책장을 비스듬히 놓고 실눈도 떠야 한다. 문장과 각장의 배열에도 퍼즐이 있어 되돌아 읽게도 된다. 진중권은 여기저기 샛길이 뚫린 자신의 텍스트 안에서 독자가 신나게 헤매다가 각자의 지도를 그리길 희망한다. 이 미학자에게, 우연이 빚는 화음과 흩어진 별들이 그리는 별자리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을 것이다. 지난 여름부터 정치 칼럼을 중단한 진중권은, 기술미학 연구로 바쁘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놀 거리’가 너무 많다. 오랜 바람을 실현한 초경량 프로펠러 비행기 조종은 그중에서도 황홀한 놀이다. 헤어질 즈음, 진중권은 늦둥이의 돌 사진을 자랑하는 아빠처럼 티없는 표정으로 비행장 풍경 사진을 보여주었다. “하늘에 오르면 속도감이 사라지고 고요해지는 순간이 있어요.” 그는 지금, 고도를 높이고 전망을 구하는 중이다.

-올해 6월 “글쓰기의 영도(零度)에 이르렀다”는 고백을 마지막으로 <씨네21>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칼럼 연재를 중단하셨습니다. 글쓰는 자로서 이상과 현실 사이에 괴리가 심해 글을 쓸 수 없는 상태라고 설명했죠. 공적인 글쓰기를 멈추겠다며, 규범적 발언보다 기술적(記述的 descriptive) 발언을 하는 기록자 또는 이야기꾼이 되고 싶다는 말씀도 했습니다. ‘공적인 글쓰기’가 지칭하는 정확한 내용은 무엇이었나요? =사실 모든 글쓰기는 공적이죠. 논객으로서 신문, 잡지에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글을 쓰지 않겠다는 의미였어요. 사적으로 침체돼 있었고 요즘도 그 여운이 남아 있어요. 관심사도 정치보다 미학, 문화, 예술쪽으로 이동했고요. 최근에는 기술미학(technoaesthetic)쪽으로 접근하고 있어요. 비꼬고 풍자하기보다 왜 어떤 사태가 벌어졌는가를 차분히 짚는 쪽입니다.

-라디오 <SBS 전망대> 진행을 끝내면서 펴낸 <첩첩상식> 서문에서 “나는 썩어가고 있다”고 썼습니다. 자기를 배려하지 못하고 있다는 위기감의 표현이었나요? =사회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정작 나의 상태는 돌아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올해 2월부터 들었고 힘들었어요. 발육이 늦는지 감정 처리와 인간관계 문제를 뒤늦게 겪기도 했고요. 저로서는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어요. 제가 굉장히 낙관적이거든요. 어렸을 때도 밥만 먹여놓으면 잘 놀았고 사막 한가운데 떨어뜨려놓아도 전갈이랑 낙타랑 사귀며 잘 살 사람이에요. 아주 불리한 상황에 던져질 때조차 핸디캡을 안고 게임한다고 생각하니 지면 본전이고 이기면 더욱 즐거웠죠. 그처럼 천하에 겁날 게 없던 성격인데 확 가라앉으니 힘들었죠.

-황우석 박사 지지자들에 의한 감금 사태가 결정적인 사건은 아니었군요. =그건 최악의 상황이 지난 뒤 일어난 에피소드에 불과했어요. 하지만 “황우석이 누구야? 줄기세포가 뭔데?” 하는 소수를 빼고 노빠와 박빠가 합친 90%가 황빠가 되어 파시즘이 횡행하는 광경을 보고 대중이란 무엇일까, 듣길 원하지 않는 이들에게 내 이야기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었어요. 나름의 지식과 첨단 IT기기로 무장했다고 믿고 비판자들이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져 있다고 보는 사람들한테 말이죠.

-며칠 전 <EBS 토론카페>의 ‘대한민국 강남, 어떻게 볼 것인가’ 편에 패널로 출연하셨죠. 논객 활동을 재개하시나 싶기도 했는데요. =아닙니다. 한국 부르주아 문화가 왜 천박한지 역사적 연원을 서구와 비교하는 이야기를 제작진에게 했더니 토론이 되겠다고 섭외가 들어왔어요. 하지만 막상 스튜디오에 가보니 한나라당,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이 와 있더군요. 시초는 <월간중앙>에 제가 쓴(??) 글 같아요. 편집부에서 싸움을 붙이려고 했는지 강준만씨가 강남을 찬양했다며 책을 보냈거든요. 책을 읽고 찬양이라고는 볼 수 없다고 했더니, 그럼 독자적으로 글을 써달라고 해서 보냈는데 결국 잡지에는 ‘격돌’ 식으로 제목을 붙였더라고요. 못 말려요, 정말. (웃음)

-논객은 어떤 존재일까요? 검객도 아니고. (웃음) 자객, 식객, 객(客)자 들어가는 단어들의 고유한 느낌이 있는 것 같아요. 소속없는 낭인의 이미지에다 때로는 무협지적 로맨티시즘도 비쳐나고. =말의 검객이겠죠. 칼을 쓸 데 써야지 함부로 쓰면 안 되니까 강한 윤리성이 필요하고요. 무협지적 낭만, 그런 것도 있죠. 왜냐하면 인터넷 문화와 결합하면 오락적, 게임적 상황이 되기도 하니까. 이것도 구술문화예요. 구술문화에서는 누가 옳냐 그르냐보다 누구의 내공이 세냐를 주목하거든요. “와, 포스가 느껴지는 글이야!” 이러면서. (웃음) 그러다 홀연 강호를 떠나기도 하고.

-이상적 조건의 담화가 아닌 다음에야 어떤 싸움에 투신한 사람은 뒤엉켜 싸우다보면 ‘적’과 닮아가고 있다는 두려움과 불쾌함에 빠지는 순간이 있을 듯한데요. =자기야 상대와 다르다고 생각하겠지만 대중이 볼 때는 똑같은 놈 아닌가요. 그것을 전제하고 들어갔으므로 불쾌는 없었어요. 피곤한 건 당연한 기본 전제까지 거론해 논의를 퇴보시키는 상대죠.

-<매트릭스> 시리즈의 완결에 즈음해 <씨네21>에 기고한 글에서, 논객 역시 ‘매트릭스’의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예정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회의를 피력한 바 있어요. 수구세력 자체의 힘이 수그러들었고 논객들이 특정 당파에 투신하면서 논객의 시대는 갔다고 말씀하신 적도 있죠. 요즘도 같은 의견인가요? =원래 저는 합의된 공공성과 시민사회 상식이 논객들이 공유하는 지반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바탕 위에서 어떤 당파를 지지하느냐는 개인의 문제고요. 그런데 현실은 좀 다르더군요. 대중이 논객을 편들 때는 옳은 이야기를 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해주기 때문인 점이 없지 않아요. 그 점을 논객이 이용하기도 하고요. 논객은 대중이 들어야 할 이야기를 해야 하고 그것이 지지자들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와 어긋날 때는, 고립될 각오를 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그 고독을 못 견디는 것 같더군요.

어릴적 다락방에서 비행기 디자인하며 놀았어요

-안산국제넥스트영화제의 초청을 받아 디지털 단편영화를 연출하신다고요. =영화는 이렇게 만들어진다는 감을 잡으면 이론할 때 큰 도움이 되겠죠. 어떤 영화일지는 아직 몰라요. 강한섭 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제가 초경량 프로펠러 비행기 조종을 배우고 있다니까 그 체험을 찍어보라고 하더군요. 영구기관 발명가들한테도 관심이 있어요. 요즘도 하루 몇건씩 특허청에 영구기관을 발명했다고 들고 오는 분들이 있대요. 그들을 진지하게 인터뷰하고 “아무래도 에너지보존법칙에 위배되니, 법칙부터 다시 써야겠다”는 결론도 내고, 재밌지 않을까요?

-어린 시절 취미가 모형 전투기 조립이었죠? 마침내 조종까지 하시는군요. 비행기라는 기계에 매료되신 건가요, 아니면 하늘을 나는 행위가 좋은 건가요? =비행기에 반한 거죠. 패러글라이딩이나 기구 타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거든요. 비행기도 미끈한 제트기는 별로고, 1, 2차대전 사이에 나온 프로펠러 달린 단발기, 쌍발기를 좋아해요. 털털거리는 소음이 나야 좋아요. 모델링을 해보면 그쪽이 훨씬 재미있어요.

-동력이 전달되는 메커니즘이 형태로 노출되어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일까요? =그렇죠. 단발기나 쌍발기는 어떤 식으로 뜨는지 원리가 이해되는데 제트엔진만 해도 제 머리에 개념이 없거든요.

-어렸을 때 놀이를 스스로 발명하고 혼자 승부를 걸며 노는 아이였을 거라는 짐작이 갑니다. =다락방에서 비행기 디자인하고 현미경 들여다보고 환등기 틀며 놀았죠. 프라모델을 망원경으로 보면 꼭 진짜 같았어요. 아이들과 부대끼는 일 자체를 버거워해서, 친한 친구가 생기면 다락방으로 초대해서 놀았죠. 납땜도 하고 시계, 라디오, 만년필을 해체해놓고 조립을 못해서 애먹기도 했죠.

-공학적인 머리와 손재주가 발달하고 기계에 대한 미감이 예민했던 것 같은데, 공대나 미대를 지망하지 않고 인문학을 택한 점이 의아합니다. =고1 과정까지는 중학교 때 미리 수학을 떼고 들어가 쉬웠는데 2학년부터 줄곧 놀면서 수학과 멀어졌어요. 수학 문제를 풀 때도, 출제자의 의도는 무엇일까 추리하는 심리학적 접근법을 썼죠. (좌중 웃음) 상식의 관점에서 문제를 풀고 심리학적으로 분석해서 답의 근사치까지 내는 방법이 있거든요.

-그때부터 이미 상대의 언어를 분석하셨군요. (웃음) =수학 문제의 인문학적 솔루션이랄까. (웃음) 그런데 정작 대학입시는 제 편법이 전혀 안 통하게끔 출제된 거예요. 불합격을 확신하며 시험장을 나서면서 “음, 비록 적이지만 문제는 잘 냈다. 나 같은 놈이 풀 수 없게 내야지. 올해 출제 잘됐다”라고 높이 평가했죠. (좌중 폭소) 근데 너무 어렵게 나온 탓에 변별력이 없어져 득을 봤어요.

-작고하신 부친께서 개척 교회의 목사셨습니다. 자라면서 영성이나 원죄 의식을 저항감없이 내면화한 편인가요? =그런 가정에서 자라면 교회에 다니느냐 마느냐를 떠나서 어려서부터 보고 들은 패러다임이 몸 안에 들어와요. 본능 비슷한 것이 생기죠. 여름날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면 천군천사가 나를 데리러 오는구나, 언젠가 저 사람들이 내게 올 거야라는 느낌을 자연스레 가졌어요. 그런 것이 종교성, 종교적 체험인 것 같아요. 세뇌는 역시 어릴 때 해야…. (웃음)

-유물론을 접한 다음 신앙과 마찰은 전혀 없었나요? =유물론, 관념론은 철학과 과학의 문제지만 종교는 영성의 문제이기 때문에 영역이 전혀 다르다고 봐요. 이쪽 명제와 저쪽 명제의 쓰임새가 다른데 같은 걸로 착각하는 것이죠.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명제를 생물학적 문제로 이해하면 곤란해지잖아요? 대학 시절 생물학을 배우러 교양수업에 들어갔는데 창조과학회원인 교수님이 교과 내내 진화론의 문제점만 강의해서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있어요. 진화론의 문제점이 창조론을 뒷받침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10대에 아버님을 여의고 어머니, 누님들과 생활하면서 특별히 예민하게 발달한 부분이 있나요? =중2 때부터 여성 권력 밑에서 살았죠. (웃음) 누나들이 일곱살, 세살 위라서 싸우자니 논리가 달려 속을 끓였죠. 우리 가족은 서로 방해하거나 충고하지 않는 불문율 비슷한 게 있어요. 얼마 전 <책하고 놀자>를 진행하는 시인 김갑수씨를 만났는데 “누나가 안부 전해달래요”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몇몇 에세이를 종합해보니 내성적인 외톨이였다가, 중학교에서는 모범생이었고 고교 시절엔 정학을 세번 받았으니 매우 다채로운 학창 시절이었나 봅니다. =고등학교 때는 짜증이 나서 일부러 다르게 살아보자 결심했어요. 그 시절에는 입시경쟁도 덜했거든요. 전두환이 과외를 금지시키고 대입 정원을 두배로 늘린 점도 작용했겠죠. 공부 잘하는 애들과 못하는 애들이 함께 어울려서 놀고 담배도 같이 피우고(웃음) 수업 끝나면 농구, 축구를 같이 했어요.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공차고 들어오자마자 장기 한판을 더 두는데, 모범생들은 바로 책상에 앉았죠. 그럼, 우린 독한 놈들이라고 감탄하고.

한국은 구술문화가 강해요

-선생님 경우는 학생운동을 시작한 계기도 현실을 바꾸겠다는 의분보다 진보철학의 논리적 명징성에 매료된 것이 먼저 아니었을까 짐작하는데요. =운동권에는 두 부류가 있었을 거예요. 어려서부터 보고 자라 운동에 합류한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운동권 선배들은 똑똑하다, 우리가 모르는 책을 읽는다는 호기심에서 비롯된 경우죠. 전 후자였고 전공 외에 유일하게 공부하고 토론할 수 있는 문화에 끌렸어요. 반면 “죽창이 되려 하네” 같은 노래의 정서에는 적응이 어려웠죠. 혁명으로 세계가 바뀐다고 진지하게 믿은 사람도 있었겠지만 저는 목표를 못 이룬다 해도 ‘올라탈 수밖에 없는 수레바퀴’의 느낌이 더 강했어요. 어려서는 알지도 못하면서 쿨한 니체를 좋아하고 인용했는데 대학에 와서 읽은 마르크스의 저작들은 자본주의 사회를 엑스레이 찍듯 보여주더군요. 텍스트의 마법에 걸려 텍스트를 세계로 착각해버린 것이죠. 지금은 <자본론>을 읽고 알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생각임을 알지만 당시에는 자본론이 곧 자본주의 실체라고 생각했어요. 거기서 벗어난 다른 이야기를 하면 반동, 이단, 비정통, 수정주의가 됐죠. 돌아보면 우리가 텍스트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중세적이었던 것도 같아요.

-과거에 한번 읽고 아는 척 덮어버린 책들을 지금 다시 읽으면 가려졌던 이치가 보이지 않을까 싶을 때가 있어요. =모든 텍스트가 그렇죠. 마르크스의 이야기는 지금도 80%는 맞아요. 특히 한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는 명제는 영원한 진리인 것 같고, 생산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도 통용되는 이야기죠. 단, 마르크스만 해도 산업혁명의 자식이에요. 패러다임이 달라졌죠. 생산의 부가가치,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부분이 직접적 노동력이 아니라 아이디어, 디자인, 컨셉, 브랜드가 됐고, 소비도 기호화되어 생물학적 생존비용보다 기호적, 비물질적 소비에 들어가는 부분이 커졌어요. 선진국에서는 어느 단계에 이르면 기계를 직접 만들지 않고 디자인만 하죠. 삼성의 경우도 연구 인력이 약 3만4천명에 이른다고 하는데 이 정도면 생산자죠. 생산의 주체와 성격이 변한 시대에 진보를 이야기하려면 사유의 전환이 필요해요. NL은 농경사회 틀에, PD는 산업사회 틀에 사로잡혀 있는 사이에 대중의 몸은 이미 저쪽으로 넘어가 있으니 대중의 입에서 ‘수구진보’라는 말이 나올 수 있죠.

-1994년부터 1999년까지 독일 베를린에서 공부하셨습니다. 초반 3년은 놀면서 보냈다고 알려져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시간이었나요? =유학에는 보통 두 가지 압박이 있죠. 학위를 따야 한다는 부담과 집에 학비를 신세지니 빨리 공부를 마쳐야 한다는 부담. 그런데 나는 떠나기 전에 이미 모교 미학과와 척진 터라(웃음) 학위가 소용이 없었고, <미학 오디세이> 인세가 다달이 50만원씩 들어와 집에 송금까지 했어요.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는 파티, 전시회, 여행지를 돌아다니며 놀고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관찰했어요. 문화적 코드의 섬세한 차이를 관찰하고 맥락을 이해하는 감각은 남자가 여자보다 훨씬 떨어지는 것 같아요. 한국적 코드가 독일에서도 통할 거라고 달려드는 한국 남성들을 많이 봤죠.

-같은 우파 매체라 불려도 서구와 한국의 보수적 언론은 공동체 원칙을 바라보는 합의의 좌표부터 차이가 크지 않습니까? =한국은 구술문화가 강해요. 말은 하면 흩어지지만 글은 남기 때문에 일관성이 중요하죠. 10년 전에는 행정수도 안 옮기면 나라 망한다고 했던 사람들이 10년 뒤에는 수도 이전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자기 말을 뒤집는 것은 구술문화 전통이에요. 월터 J. 옹의 구술문화 연구를 보면, 어느 아프리카 부족에 왕가 찬양가가 있었는데 20년 만에 인류학자가 방문했더니 그새 정권이 바뀌어 노래 내용이 바뀌었더래요. 이유를 물었더니 부족민들은 우린 언제나 이 노래를 불렀다고 우기더래요. 황우석 사태 때도 언론은 나라가 황 박사를 외롭게 내버려두었다고 성토하다가 며칠 뒤에는 황 박사에게만 지원을 몰아줬다고 난리였죠. 한국의 매체는 표제도 구술 문화적으로 붙여요. 인터넷은 어차피 구술적 매체라고 해도 활자매체의 총아인 신문조차 감정적, 자극적, 선동적이죠.

-모교에 자리잡기 어려울 줄 알고 학위에 집착하지 않았다고 하셨는데요. 강단에 진입하는 데 실제로 장애를 느꼈나요? =일단 박사학위가 없고요. 만일 학위가 있다고 해도 모교뿐 아니라 어디서도 어려울 거예요. 대학원 시절 교수와 마찰이 있었죠. 가끔 들어오는 제안에는 박사학위부터 받으라는 조건이 따라붙어요. 그런데 지금 박사를 따는 일은 저로서는 형식에 구애받는 행위가 되고 그래서 제 삶의 원칙과 어긋나는 면이 있거든요. 그래서 굳이 하고 싶지 않아요. 강사인 지금은 강의만 하면 되고 교수회의에 참석 안 해도 되고 자유로워요. 강사료만 현실화되면 만족해요. 교수가 안 돼도 “나는 훌륭한 강사다”라는 자부심을 갖고 살 수 있잖아요. 방법은 간단해요. “전국의 강사들이여, 단결하라” 하고 딱 2주만 파업하면 강사의 수업 분담률이 50%가 넘으니- 임금 점유율은 7%니까 43%를 착취당하는 거예요- 대학이 마비되거든요. 그런데 강사들은 계급의식이 없어요. 예컨대 영국 노동자들에게는 “나는 노동자 계급이야”라는 자부심이 있잖아요. 한국의 강사들은 언젠가 교수가 된다는 생각만 하고, 그것을 위해 지금 희생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교수와 강사는 다른 직업일 수도 있는데.

사유할 때부터 문자, 소리, 그림의 결합도를 고려해야 해요

-선생님께 글쓰기는 주로 사유의 수단인가요? =생각과 글은 달라요. 생각은 잠재성의 영역에 속하는 반면 글쓰기는 실현이기 때문에 현실성 영역으로 옮겨가요. 글 자체에 논리가 있어서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기도 하죠. 쓰다보면 안다고 믿었던 걸 모르는 경우가 있고 몰랐다고 생각했던 걸 알고 있는 경우가 있어요. 그래서 손가락으로 사유한다고 말하는 거죠.

-글을 보면 ‘프레젠테이션’을 고심한 인상입니다. <폭력과 상스러움>,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이나 칼럼들을 보면 책의 목차 구성부터 문단 배치의 효율성까지 고민한 흔적이 생생합니다. 그래서 편집자들이 좋아하는 필자고요. =엠블렘적 사고방식이죠. 사람들은 흔히 ‘인문학의 위기’라 하면 딱 두 가지만 생각해요. 첫째, 정부가 인문학 지원을 안 해준다. 둘째, 어렵게 글쓴 우리도 반성해야 한다. 대중이 이해하는 쉬운 낱말로 바꿔쓰자. 하지만 그건 틀린 사고예요. 지금은 소리와 그림이 문자를 밀어내는 시대예요. 처음 사유할 때부터 문자, 소리, 그림의 결합도를 고려해야 해요. 어떤 이미지를 보면 누구의 이론이 떠오르고 푸코를 읽다가 고야의 그림을 상기해야 해요. 연구에는 자료뿐 아니라 이미지를 찾는 작업까지 포함돼요. 또 하나는 구술성과의 결합이에요. 인터넷은 대화적 환경이에요. 모놀로그를 고집하면서 독백을 쉽게 하면 될 거라고들 생각하는데 아니죠. 머릿속에 늘 독자를 두고 독자와 대화해야 해요. 읽다가 막히면 대화 상황으로 단락을 지어 호흡을 맞춰야 해요.

-영화잡지에도 대입할 만한 이야기네요. =푸코도 <말과 사물>을 열며 벨라스케스 그림부터 때리고 들어갔잖아요. 글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낡았다고 느껴요. 많은 사람이 미문(美文)을 좋아하는데 미문도 하나의 장르지만 예술작품을 ‘아름다움’으로 평가하는 것은 다분히 19세기적이고 고전적인 기준이거든요. 그건 책과 텍스트의 차이도 돼요. 책은 완결된 형태고, 필자의 모놀로그를 독자가 다 들은 다음 상찬해주죠. 그러나 전자 글쓰기 시대에는 반제품, 즉 핸드북 혹은 매뉴얼을 쓰는 거예요. 내가 쓴 텍스트를 독자가 보고 가공, 패러디, 복제해서 자기 텍스트를 만드는 것이죠.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도 읽고 독자가 각자 영역에서 놀이를 하라는 매뉴얼이에요.

-그처럼 글쓰기 형식 실험의 충동을 느낀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의식하진 않았으나 <미학 오디세이>를 쓸 때부터 노동자 문화예술운동연합에서 노동자를 대상으로 글을 쓰다보니 영상성과 구술성을 결합하게 됐죠. 고교 시절 친구들과 서로 갈구던 말장난의 흔적도 있고요.

-선생님의 저술은 논술 참고서 같은 면도 있어요. 한줄 인용하고 한줄 쳐부수고. (웃음) =<미학 오디세이>는 원래 고등학교 졸업한 나이의 독자를 대상으로 썼는데 요즘은 독자층이 중학교까지 내려갔대요. 논술 열풍의 일환이겠죠. 그런데 현재 논술 교육에는 쓸데없는 내용이 많다고 봐요. 글도 건물과 같아요. 건물이 가장 쉽게 전달되려면 고전주의적으로 지어야겠죠? 모더니즘이나 몽타주를 건물에서 시도한다면 좀더 복잡한 미감이 필요할 테고요.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문제를 다르게 보는 눈이에요. 어떤 사안에 대해 남들이 이미 한 이야기는 반복할 필요가 없는 거 아니에요? 학생들을 가르쳐보면 그 부분이 결여돼서 글이 모호하고 평범해져요. 가령 동성애 문제를 인권 차원에서만 접근하는데 동성애자의 눈으로 보면 세계가 달라 보이고 풍부한 세계상에 생산적으로 기여한다는 방향으로 접근하면 패러다임이 바뀌는 거죠. A와 B, A+B/2 중 어느 견해를 취하느냐보다 어느 입장에든 새로움을 만드는 글쓰기가 중요해요.

자기 영역에서는 프로그래머가 되어야 한다고 봐요

-끊으면 금단현상이 오는 도락은 없습니까? =술은 끊겠는데 담배는 못 끊겠어요. 신체가 파괴되는 데에서 나오는 쾌감이란 것이 좀 강렬하죠.

-소설을 즐겨 읽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TV연속극 보면 진행이 뻔하고 느려서 스트레스를 받고요. 한국 소설에서는 모더니즘적 성취를 잘 찾지 못했어요. 보르헤스 같은 환상적 리얼리즘 소설, 카프카와 에드거 앨런 포를 좋아하고 마크 트웨인은 유머감각을 좋아해요. SF소설은 어려서 즐겼는데 쥘 베른 책은 최근 새로 장만했어요. SF는 과거 문학적 장르였지만 이젠 현실의 원리가 되어버렸죠.

-영화를 보다가 간혹 “이 영화 혹시 내가 찍었나?” 싶을 때가 있잖아요. 텍스트 속에서 본인의 전생이 아닌가 싶은 인물을 마주친 적이 있나요? =그런 경우 이해가 빨라요. 사실 저는 발터 벤야민 전집도 못 읽었는데, “이건 전공자보다 내가 잘 이해할 수 있어”라는 확신이 드는 순간이 있어요. 보르헤스의 경우는 반대로 ‘철학 오디세이’류의 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형이상학적 도서관’이라는 컨셉을 잡았는데 나중에 보르헤스를 읽다보니 ‘바벨의 도서관’과 똑같더라고요. 큰일날 뻔했죠.

-예술의 한 장르나 형식이 태생적으로 특정 이데올로기와 친화적일 수 있다고 보세요? =그렇게 말할 순 없죠. 공부를 하다보면 다양한 예술의지를 모두 좋아하게 돼요. 저는 파울 클레, 칸딘스키부터 좋아했는데 재현 회화들에도 재미를 느끼게 됐어요. 발터 벤야민은 영화가 파시즘의 도구로 부적합하다고 했지만 결국 파시스트들이 대중조작에 영화를 활용하고 몽타주를 선전에 이용했잖아요? 전체주의 국가가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재현 회화를 선호하는 데에서 보듯 약간의 친화성은 있을 수 있죠. 19세기 형식을 20세기에 끌어들이는 낡은 행태에서 미적 보수성, 정치적 보수성이 드러나는 거죠. 그러나 같은 이데올로기도 전혀 다른 예술혼과 결합할 수 있어요. 마르크시스트 안에서도 모더니즘을 긍정하는 그룹이 있고 부정하는 그룹이 공존하니까요.

-개인의 심신, 즉 나의 몸과 마음이 망가지지 않아야 사회도 온전하다고 보세요? =존재 미학적 측면과 제도적 측면, 두 가지가 있어요. 우선 개인이 자기를 형성하는 미학과 취향, 원리를 가져야죠. 그런데 인간의 몸은 사회에 의해 만들어지잖아요. 따라서 사회적으로 내 몸을 만들어가는 권력의 망과 제도적 틀을 바꿔나가는 노력도 있어야 해요. 이따금 인문학자 중에 중세 수도승 같은 고립된 길을 걸으며 존재 미학을 실현하려는 사람도 보는데 그 결과는 허탈하죠. 자기 삶의 형성원리를 세워야 한다고 말하면 엘리트 미학이 아니냐는 의구심어린 반응도 있어요. 글쓰는 사람이 100명이면 글로 먹고사는 사람은 10명이 안 되니까요. 하지만 많은 사람이 남들이 다하는 일, 남의 욕구를 욕망한다는 것은 다른 영토가 텅 비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죠. 그러니까 주류에 편입이 안 될 때 낙담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게임을 개척할 기회로 받아들일 수도 있어요.

-존재미학이라는 개념에는 삶을 예술작품으로 보는 태도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삶을 예술작품으로 여기는 이를 주변 사람들은 불편하게 여깁니다. 굳이 예술이라는 영역이 있는 것도 삶이 곧 예술이 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고요. =한때 좌파미학의 주요한 논점이었죠. 부르주아들은 삶의 산문성과 예술의 운문성을 항상 분리시킨다는 비판이요. 모더니스트 예술가들은 그래서 예술적 실험을 사회적 실천으로 수행해 양자의 벽을 허물려 했고요. 중요한 것은 개인의 특이성(idiosyncrasy)에 대한 톨레랑스예요. 다수와 다른 사람을 왕따시킬 뿐 아니라 이지메까지 가하는 사회에선 일상의 공포정치가 생기고 사람들이 집단에 속해야 안전하다는 생각을 품게 돼요. 자연히 창의력이 사라지죠.

-정치에서 미학으로 초점을 이동한 것 외에도 새로운 철학적 기획이 있을 것 같습니다. =미디어에 의한 패러다임 변화를 읽는 데 집중하고 있어요. 탈고를 앞둔 새 책은 <호모 코레아니쿠스> 아니면 <해부대 위의 한국인>이 가제인데 미디어 및 생산방식과 관련된 한국인의 신체 변화에 관해 썼어요. 한국인의 몸이 지닌 전근대적, 근대적, 탈근대적 측면을 정의하고 그들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논의하죠. 프로게이머는 뇌 구조가 다르다는 말도 있지만 젊은이들의 신체는 다르잖아요. 몸이 자연에 직접 작용하는 농경시대에는 생산의 노하우가 나이와 관계있으므로 위계질서가 지배하고, 산업사회는 인간의 신체가 기계와 관련되기 때문에 군대식 훈육에 들어가죠. 탈근대는 정보사회라 생산양식이 비물질화돼요. 저는 프로게이머들을 미래의 블루칼라, 프로그래머들을 미래의 화이트칼라라고 봅니다.?? 정보사회에서는 실질적 물질적 생산에 직접 종사하는 사람이 노동인구의 절반 이하가 되고 나머지는 정보의 생산, 가공, 유통에 참여하죠. 한때 프롤레타리아트가 농민계급을 해체시킨 것처럼 이젠 정보 프롤레타리아트가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를 해체할 거라고 봅니다.

-하긴 <미래용어사전>을 보니 ‘가족 내 기술의 달인’(Family Tech Guru)라는 신조어가 있더군요. 주로 가족 중 가장 어린 식구가 권위자가 될 거라고 예측하던데. =새로운 세대는 미디어와 몸의 결합도가 달라요. 며칠 전 강의가 끝나고 한 젊은 분이 차 한잔 같이 하자고 해서 다음 강연이 있다고 사양했어요. 순식간에 휴대폰을 눌러보더니 “상수역에서 양재역까지 딱 42분 걸리거든요” 하는데 할 말이 없었죠. 라디오 생방송을 할 때는, 알람 설정을 못해 애먹는다니까 작가가 대뜸 제 휴대폰을 낚아채더니 한손에 짐을 든 채 나머지 한손으로 엘리베이터가 12층에서 지하 1층 가는 동안 3회에 걸친 시간차 알람을 설정해서 문 열리기 전에 돌려주더라고요. (웃음) 이 세대는 몸이 완전히 다르구나, 쇼크를 받았죠.

-최근 목격한 사회·문화적 현상 중에 미감을 거스른다고 느낀 일이 있다면요? =제일 끔찍한 것은 황우석 사태 때 김소월의 시를 인용하고 난자를 기증할 때마다 무궁화를 다는 퍼포먼스였죠. 최근에는 TV시대극이 판타지와 신화쪽으로 흐르는 것을 좀 걱정스럽게 보고 있어요. 역사를 보는 대중의 눈이 역사관이 옳으냐 그르냐, 사실에 부합되느냐를 무시하고 드라마와 판타지로 기울고 테크놀로지까지 그것을 강화하는 데에 결합하면 파시즘적 별자리를 형성할 가능성도 있죠. 물론 역사학계까지 뛰어들어 같은 일을 벌이는 중국이나 일본보다는 낫지만요. 젊은이들의 게임도 들여다보면 법과 질서가 미처 수립되지 않은 청동기적 시대에 주군에게 희생하는 상황이 많아요. 도시계획이라든가 모더니스트적인 게임도 얼마든지 가능하거든요. 게임에 몰입하는 것도 좋지만 어떻게 게임에 들어가고 나오느냐가 중요해요. 야바위 게임이라면 바깥으로 빠져나와 이 게임의 규칙이 도대체 내가 이길 수도 있게끔 돼 있는가 살필 줄 알아야 해요. IT 강국이라면서 PC방을 가면 모두 오락만 하고 있는데 컴퓨터는 기본적으로 디자인과 프로그래밍을 위한 틀이거든요. 이제는 프로그래머가 되느냐, 프로그래밍을 당한 채 살아가느냐가 관건이 될 거예요. 모든 사람이 모든 분야에서 프로그래머가 될 수는 없겠지만 자기 영역에서는 최소한 프로그래머가 되어야 한다고 봐요. 아니, 남의 영역에 프로그래밍된 채 들어간다 해도 적어도 프로그램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는 메타적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경험을 토대로 사람이 할 수 있는 유희 중에 가장 즐거운 것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제 경우에는 개가식 도서관에서 책에서 책으로 넘나드는 정신적 유희였어요. 헤르만 헤세가 말한 유리알 유희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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