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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후면비사] 한반도는 전쟁, 극장가는 홍보 전쟁
이영진 2006-12-28

영화사간 관객 모시기 치열… 피난지에선 이벤트, 서울에선 뉴스영화 상영

극장이란 참으로 독특한 공간이다. 사회적 불황에도 외려 호황이오, 라고 외칠 수 있는 곳이니 말이다. 한반도는 미군의 네이팜탄 무차별 투하로 가공할 만한 전소(全燒)의 스펙터클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대구와 부산 등 피난지의 극장들은 “기마 경관들이 등장할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특히 1951년 가을부터 외화 수입이 재개된 뒤로 “유일한 오락공간이었던” 극장을 찾는 관객이 급증했다. “저속하고 질 낮은 영화를 창고 같은 극장에서 상영해도” 개의치 않았다. 1951년 불이무역주식회사, 신한문화사를 시작으로 2년 동안 외화 수입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는 30여곳으로 늘어났을 정도다. 극장을 중심으로 댄스홀과 탁구장 등도 생겨났다.

영화사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홍보전 또한 격렬해졌다. ‘초특작’, ‘신수입’, ‘최신판’, ‘결정판’이라는 짤막한 광고문구가 이미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사실이 들통난 이상 계속 써먹을 순 없었다. 새로운 유인책을 만들어야 했다. 외화의 경우 이른바 스퍼인 포즈, 즉 국문자막이라는 표식을 새겨넣는 것이 유행이 됐다. 1949년 들어 일본어 자막을 없애고 모든 수입영화의 한국어 자막을 의무화했으나 까딱하단 “골로 가는” 난리통에 빈틈없이 지켜질 리 없었다. “해방 전후에 상영됐던 영화나 미군 부대에서 유출된 16mm영화”가 자막없이도 버젓이 상영되기도 하던 때였으니, 국문판 자막을 만들었다는 광고는 곧 뜨끈뜨끈한 신작을 들여왔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막의 비밀> <황야의 결투> 등과 같은 성림(聖林, 할리우드)에서 들여온 서부대활극처럼 관객이 기꺼이 흥행을 약속한 장르가 아니라면 국문판 자막을 넣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우리말로 번역된 대사를 규격에 맞추어 백지에 쓴 다음 동판을 떠서 자막기로 치려면” 일본에까지 가서 따로 비용을 들여 작업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쩐’이 부족한 영화사들은 발성영화의 등장과 함께 서서히 은막 뒤로 사라졌던 변사를 재등장시키는 이벤트를 감행한다. 1950년대 말 대구에서 상영된 <종군몽> 등의 중국영화들과 이듬해 초 개봉한 <춘희> <창살없는 감옥> 등의 프랑스영화들은 변사 1세대로 꼽히는 조월해가, 1952년에 상영됐던 영국영화 <공포의 섬> 등엔 대구에서 명변으로 통하던 박칠성이 변사로 나섰다. 정종화는 발성영화의 출연 이후 변사의 역할은 줄어들었지만 기술과 시설의 노후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고, 1950년대 초에는 한때 배우들보다 몸값 높은 ‘스타아’로 군림했던 그들이 전쟁 당시 피난지에선 개봉에서 실패한 뒤 재개봉한 영화들의 홍보 도우미로 나섰다고 말한다.

흥미로운 건 대구와 다른 서울에서의 홍보전 양상이다. 1950년 9월28일 수복, 1951년 1월4일 중국 참전 등으로 피난보따리를 움켜쥐고 긴장을 머금어야 했던 서울에선 현실을 잊고 한가한 극장 나들이가 불가능했다. 피난지와 달리 서울의 극장가에서 <6·25 사변 전황 늬우스>를 덤으로 상영했는데, 전황이 궁금할 수밖에 없는 시민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심지어 ‘사변 세계 종합 뉴스 대회’라는 이름으로 “장내 정리비 100원만을 받고” 뉴스영화를 모아서 상영하는 일도 있었고, 악극 공연에 앞서서까지도 뉴스영화를 트는 경우도 빈번했다. 피난지의 극장가가 관객을 끌기 위해 영화 상영에 이벤트를 집어넣었다면, 서울의 극장가는 현실을 끼워넣은 셈이다.

누군가를 꼬드기는 기술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 이 무렵 포스터에는 ‘<역마차>를 능가하는 서부대활극’,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크 감독 작품’, ‘베니스국제영화제 대상 수상작’ 등의 문구가 훈장처럼 달려 있다. 이마저도 내세울 것이 없다면 구전 마케팅을 위해 영화사들은 앞다투어 특별유료시사회를 진행했다. 1952년 1월1일, <영남일보>에는 ‘미, 불 3대 거작 특별유료시사주간’이라는 광고가 실렸는데, <군항 지부랄탈> <오만불소동> <잠바> 등 3편의 영화를 대략 사나흘씩 미리 공개해 관심을 끌고자 했다. 평론가에겐 환대를 받았으나 대중에겐 그닥 매력적이지 않았던 전후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영화들은 특별유료시사회 대신 동시상영을 택했다. 1편 값으로 <자전차도적> <로마의 분노> 등을 함께 볼 수 있는, 물량공세로 관객의 주머니를 유혹했다.

참고: <한국영화 성장기의 토대에 대한 연구-동란기 한국영화 제작을 중심으로>(정종화,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석사학위 논문)-당시 영화 홍보에 대한 정보들은 1950년대 초 발간된 <영남일보> <영화시보> 등 희귀 자료를 수집해 쓰여진 이 논문에 상당 부분 의지했다. <한국현대사 산책>(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외국영화 포스터Ⅰ-1953∼1969>(정종화 엮음, 범우사) <신문기사로 본 한국영화>(한국영상자료원 엮음, 비발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