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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체불만(交滯不滿)
2001-09-28

비디오 클리닉 2

처방전2 교통체증에 탈진했다면

연휴만 되면 교통방송의 열렬 애청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장거리 여행객(?)들은 연휴가 휴가가 아닌 교통지옥처럼 느껴질 것이다. 차 안에서 장시간을 버틴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게다가 믿었던 교통방송마저 뒤통수를 친다면 연휴의 대부분을 도로 안에서 보내야 하는 불상사가 벌어진다. 실제로 교통방송이 처음 생긴 90년대 초에 우리 가족은 교통방송만 믿다가 서울에서 경상남도 사천까지 가는 데 무려 22시간이 걸린 적이 있다. 여하튼 비행기로 지구 반대쪽까지 갈 수 있는 시간을 내내 차 안에서 보내야 한다는 건 대단히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차 안에서 얻은 어지럼증이 가시는 즉시 영화 속의 뻥 뚫린 공간으로 침입해보자.

자동차는 달리고 싶다

답답한 자동차 대신에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여유롭게 드라이빙하는 상상을 한다면 <이지 라이더>부터 시작해보자. 영화는 <Born to Be Wild>를 배경음악으로 깔고 시원하게 달리는 두대의 오토바이로 시작한다. 원래 ‘이지 라이더’는 ‘늙은 창녀의 기둥서방’이라는 뜻이라지만 원래 뜻이 어쨌건 이들이 ‘easy rider’임은 딱 보기에도 너무도 자명해보인다. 그들이 달리다가 멈추는 경우는 멈추고 싶을 때뿐이다. 사막을 또는 도시를 배경으로 달리는 그들의 주변에 다른 차량이라고는 보이질 않는다. 낮이 밤이 될 때까지, 도로는 마치 그 둘을 위해서 만들어진 양 한가하다.

60년대 말 미국 기성세대를 비꼰 이 영화에 등장하는 두 인물은 고독해보이는 피터 폰다와 <스피드>의 악역 데니스 호퍼. 둘은 각각 이 영화의 제작자와 감독이기도 하다. 게다가 30년 전의 잭 니콜슨까지 볼 수 있다. 그러나 피터 폰다의 불편해보이는 오토바이와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60년대 음악,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편집이 지루하게 느껴진다면 이번에는 <아리조나 유괴사건>(Raising Arizona, 우일, 1987)을 보자. 코언 형제의 수작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이 영화의 도로도 한번에 한대 이상의 차를 허용하지 않는다. 니콜라스 케이지와 홀리 헌터 부부의 차, 유괴범들의 차 그리고 해결사의 오토바이 뿐, 애리조나의 한가로운 도로 위에는 엑스트라 차량이 절대 등장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도 속도감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은 니콜라스 케이지가 기저귀를 훔치는 시퀀스. 스타킹을 뒤집어쓰고 경찰차를 피해 뛰는 이 장면은 당시 23살의 청년이던 니콜라스 케이지의 휘청거릴 정도로 깡마른 몸과 꺼벙한 표정과 합세해 묘한 짜릿함을 준다. 13년의 세월을 건너뛴 니콜라스 케이지. 그는 여전히 도둑이다.

그러나 이번엔 아기가 아니라 고급차 전문 털이범. <아리조나 유괴사건>에서와 마찬가지로 <식스티 세컨즈>(Gone in 60 Seconds, 브에나비스타, 2000)에서도 그는 도둑질에서 손을 떼려는 건실한 청년으로 나오지만 상황은 그를 놔두지 않는다. 한 시간 안에 50대의 차를 훔칠 만한 재량을 갖춘 케이지 같은 도둑이 연휴길 도로의 차들을 싹쓸이해갔으면 싶겠지만 차를 증발시키지 않는 이상 차량 절도범도 꽉 막힌 도로 위에서 별다른 수가 없을 것이다. 도로교통법을 위반하고 온갖 기교를 부려서라도 도착지에 일찍 도착하고 싶다면 기막힌 운전솜씨를 가진 택시운전사를 부르라. 홍보를 위해서 제작자이자 각본을 쓴 뤽 베송의 이름이 붙었지만 ‘뤽 베송의’ <택시>를 감독한 제라르 피레를 우습게 볼 것도 없다.

카레이서 출신의 피레는 실제로 시속 220km로 달리는 차의 모습을 찍기 위해 일주일간 도시의 중심도로를 폐쇄하기까지 했다. 이 영화의 아슬아슬한 속도감은 겨우 시속 60km로 달리는 <스피드>의 대형버스와 맞먹을 수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샬랑거리는 불어가 난무하는 영화 중간에 갑자기 귀에 쏙 들어오는 한국말과 불쌍한 한국유학생들의 비애도 놓칠 수 없는 황당한 웃음거리. 그러나 주변에서 이런 멋진 기술을 자랑하는 택시기사를 보기가 힘들다는 것은 꽤나 자명한 사실. 무턱대고 속도전을 감행하다간 기껏해야 앞차와 충돌하기밖에 더하겠는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크래쉬>는 자동차 충돌과 성적 흥분을 연관시켜 풀어나간다. 자동차 충돌이 생산적인 성에너지의 해방이라는 묘한 발상은 주인공으로 하여금 자꾸만 의도된 충돌사건을 재현하게 하고 그 위에 성적인 교접이라는 뉘앙스를 흘린다. 이런 위험하고 도발적인 시선을 읽는다면 그나마 안전하게 모범적으로 굴러가고 있는 당신의 차가 조금은 사랑스러워질지도 모른다.

멈춘 차가 꿈꾸는 타임머신

그래도 성이 차지 않는다면 약간의 돈을 들여 비행기를 타고 한방에 날 수도 있다. 물론 비행기라고 해서 충돌사고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탄 비행기가 공중납치되어 63빌딩을 향해 돌진한다는 무시무시한 가능성은 가능성으로서 엄연히 존재하니까 말이다. <에어 포스 원>에 탄 승객들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백악관을 비웠던 부시 대통령과는 달리 해리슨 포드 대통령님께서는 친히 기관총도 쏘시고 테러리스트들과 격투까지 벌여 인질들을 탈출시키기 때문이다. 영원한 악역 게리 올드먼은 이 영화에서 반미 러시아 테러리스트로 등장한다. 추락 위기에 놓인 비행기 안에서 믿을 사람이 대통령뿐이라니 역시 현실과 연결시키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아예 현실을 포기하고 환상을 꿈꿔볼까. 하루를 꼬박 차 안에서 보내는 게 연휴길 교통승객의 현실이라면 1분 안에 몇십년을 오갈 수 있는 것이 타임머신을 탄 마이클 제이 폭스의 현실이다.

시간여행 영화의 고전 <백 투 더 퓨쳐>(Back to the Future, CIC) 1·2·3편을 한꺼번에 복습해보자. 그야말로 ‘연작’이라는 개념에 충실하게 잘 짜여져 과거-현재-미래를 종횡무진하는 세개의 이야기는 도로 위에서 멈춰진 시간을 사는 것 같은 우리에게 약간의 위안이 돼줄지도 모른다. 2편과 3편에 등장하는 엘리자베스 슈의 앳된 모습도 숨은 볼거리다. 이 모든 얘기가 꿈만 같고 정말 미칠 듯이 답답하다면 최후의 방법은 당신의 발로 직접 뛰는 것. “Run forrest, run!”이라는 제니의 말만 믿고 끝없이 뛰는 <포레스트 검프>(Forrest Gump, CIC, 1994)처럼 생각없이 달리다보면 당신은 백구처럼 어느새 고향에 도달해 있을 거다. 느리고 고지식한 <포레스트 검프>의 감독은 앞서 시간여행의 환상을 심어준 <백 투 더 퓨쳐>의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 가장 빠른 것과 가장 느린 것은 결국 종잇장 차이인가. 그렇다면 결론 역시 무책임해질 수밖에. 여유를 갖자! 여유를 가지면 당신의 지친 다리도, 정지해 있는 자동차도 타임머신이 될 수 있다.

손원평/ 자유기고가 wetsox@hanmail.net▶ [한가위특집] 만월 만병통치(滿月 萬病通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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