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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대오불패(非隊伍不敗)
2001-09-28

비디오 클리닉 3

처방전1 개봉관에서 매표에 실패했다면

연휴길의 교통체증에서 벗어났거나 교통체증에 시달릴 필요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추석은 짧은 휴가. 따라서 연중행사 같은 극장 방문이 일어나는 중요한 타이밍이기도 하다. 그런데 연중행사를 치르는 관객이 쇄도해 빨갛게 떠 있는 매진표시 앞에서 절망하게 된다면? 꼭 보고 싶은 영화를 당장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떤 식의 대리만족이라도 느껴야 조금이나마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다면?

매진의 빨간 신호등 앞에서

‘사랑, 그 이후’를 담담하게 그려낸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를 아쉽게 놓쳐버렸을 때엔 ‘그들이 서로를 좋아하게 되기까지’를 그린 그의 첫 작품 를 보자. 아주 느릿느릿 천천히 서로에게 스며드는 두 사람의 표정은 <봄날은 간다>에서 서로에게 이력(??인력은 아닌지???)을 느껴버린 연인의 표정과 비교해보면 미묘하게 들떠 있다. 시나리오 자체가 지향하는 바도 있지만 심은하와 한석규의 섬세한 말투 하나, 눈빛 한 조각도 주목해서 보면 볼수록 감칠맛이 난다. 물론 이제 영화계를 영영 떠나버린다는 심은하의 폭탄선언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관객은 그녀의 사랑스런 모습을 더 아련하게 주목하게 되겠지만.

가을바람과 더불어 시려오는 가슴을 느끼는 대신 대서사극 <무사>를 보려다 실패한 경우엔 <올빼미의 성>을 보라. 중국이나 고려가 아니라 일본의 16세기를 무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 암살을 둘러싼 닌자들의 혈전이 펼쳐진다. 그러나 지나치게 깔끔한 화면과 정돈된 미장센은 <무사>에서 정우성이 보여주는 야성미에 미치지 못할 지도 모른다. 정우성의 모습이 못내 아쉽다면 그의 데뷔작 <구미호>를 다시 한번 보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 될 듯. 정우성의 만 21살 때, 고소영의 22살 때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구미호인 고소영과 사랑에 빠진 택시기사로 등장하는 정우성은 이 작품을 가장 부끄러워하지만, 당시 우리 영화계에선 처음 보는 특수효과가 녹아 있는 작품이다. 고소영이 여우로 변하는 모습을 비롯한 이 영화의 특수효과는 9시 뉴스에도 소개가 됐을 정도니 그때엔 그만큼 신기한 기술이었나보다.

추석 개봉을 앞둔 또 하나의 우리 영화 <조폭 마누라>. 여성의 액션과 파워, 거기다 코믹적 요소까지 합세한 비슷한 뉘앙스의 영화로는 <미녀 삼총사>를 들 수 있겠다. ‘미녀 삼총사’라는 제목이 왠지 유치해 보이지만 원제는 ‘Charlie’s Angels’, 즉 찰리라는 정체 모를 인물에게 고용된 세명의 정예요원을 뜻한다. 때로는 사근사근하고 섹시한 여자로서, 때로는 비행기에서 뛰어내리고 남자들과 격투를 벌이는 대원들로서 활약하는 카메론 디아즈, 루시 리우 그리고 드루 배리모어의 모험극은 통쾌함과 재미만을 겨냥한다면 만족할 만한 쇼이다. 그러나 미인계 따위의 장치들이 거슬린다면 좀더 심각한 이 여자, <니키타>(Nikita, 폭스, 1990)를 만나볼 것. 단순히 ‘여자 살인병기’라는 흥미유발 요인을 넘어서서 뤽 베송은 ‘니키타’라는 러시아 남성식 이름을 받은 여자의 정체성 변이를 언급한다. 따라서 <니키타>의 액션은 좀더 무거운 맛이 있고 그녀의 사랑은 <미녀 삼총사>의 그것보다 절박하다. 할리우드 스타 부부의 뒷얘기를 풀어나간 <아메리칸 스윗하트>의 매표에 실패했다면 할리우드영화에 대한 할리우드영화, 로버트 알트먼의 <플레이어>(The Player, 드림박스, 1992)로 위안을 얻으라. 현실에서는 악인도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음을 할리우드영화의 흥행코드를 빗대어 그리고 있는 이 영화의 주인공은 팀 로빈스와 우피 골드버그 등이지만 수잔 서랜던, 브루스 윌리스, 셰어, 앤디 맥도웰 등이 ‘영화 안의 영화배우’로 출연하여 낯설음을 선사한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아메리칸 스윗하트>의 대용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아메리칸…>의 주연배우 줄리아 로버츠와 존 쿠색까지도 영화 안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의 도입부에서 사용되는 놀랄 만큼 긴 롱숏도 이 영화에서 예사롭게 넘겨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극장에 가지 않은 게 다행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장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방구석에서 비디오나 보고 있는 자신이 스스로 가엾게 느껴질 수 있다. 예매는 기본이라는 매표소 직원의 말이 자꾸만 귓속을 후벼판다면 차라리 극장에 가지 않은 것을 다행스럽게 만들어주는 영화를 보라. 극장의 공포, <마티니>(Matinee, SKC, 1992). <이너스페이스>와 <그렘린>의 감독 조 단테가 지휘한 이 영화는 1962년 쿠바의 핵미사일 사태를 커다란 뒷배경으로 깔고 극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아주 유쾌하고 동시에 무겁게 그려냈다. 극장 바깥의 사건과 극장 안의 사건 그리고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의 사건이 모두 중첩되면서 대단히 시니컬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극장과 관련된 이 이야기를 비디오로 본다는 게 좀 아쉽지만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하라. 관객이 모두 비슷한 심리에 빠져 있는 어두침침한 극장 안에서 참극이 발생하던 <스크림2>(Scream2, 우성 1997)를 기억한다면 비디오를 보고 있으니 나는 안전해, 하고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극장에선 보려야 볼 수가 없는 영화를 고르는 것으로 극장에 복수하라.

<안젤리나 졸리의 로미오 그리고 줄리엣>(Love Is All There Is, 폭스, 1996)이라는 다소 긴 제목으로 최근 출시된 영화는 뉴욕 식당의 아들과 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 졸리가 20대 초반에 로맨틱코미디 연기를 어떻게 했나를 관찰할 수 있는 작품이다. 물론, 개봉은 애초부터 염두에 두지도 않은 채 오로지 ‘비디오용’으로 나온 수많은 빨간 딱지 영화들이 언제나 비디오숍의 한편에 가지런히 놓여 있긴 하지만, 잘 찾아보면 그외에도 숨겨진 미개봉 명작 비디오들은 그득그득하다.

가방 놓을 자리 하나 없이 꽉 찬 객석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똑같은 패턴을 보여주는 관객무리에 끼는 것보다 이렇게 여러 개의 비디오를 빌려다가 자유로운 자세로 세밀하게 영화를 관찰하거나 보고 싶은 장면만 주의 깊게 보는 게 더 속편한 건지도 모른다. 16:9의 화면비율을 포기하고 더러는 양쪽 끝이 잘려나간 영화를 보게 되면서 예민한 비디오 관객은 눈살을 찌푸리겠지만 그럴 경우의 차선책, 진동의자가 딸린 신촌 등지의 DVD 룸에 가본다면 그야말로 쾌적하고 실감나는 자기만의 전용극장에 온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거다.

손원평/ 자유기고가 wetsox@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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