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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부이토(汚腐以吐)
2001-09-28

비디오 클리닉 4

처방전1 명절음식에 질렸다 혹은 과식했다면

명절음식이래야 매년 먹던, 그게 그거인 것 아니냐고 생각하면서도 어찌어찌하다 결국엔 과식하고 마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간만에 만난 친지들과 어울려 식탁에서 얘기꽃을 피우는 건 기본이고, 이어서 거실에 모여 앉아 함께 먹은 과일, 성묘 마치고 무덤 주변 풀밭에서 한 조각 베어문 떡, 거기다 저녁에 만난 고향 친구들과 함께 마신 술에 안주까지 가세하고 보면….

게우고 싶도록 많이 먹고서

이제 어쩌랴. 아직도 잔뜩 남아 있는 저 맛나(?) 보이는 명절음식들이 점점 그림의 떡만도 못하게 되는 것이 안타깝다고? 사실 이 정도라면 당신은 대단한 탐식가가 아닐 수 없다. 당장 비디오 가게에 가서 데이비드 핀처의 <쎄븐>(Seven, vhrtm, 1995)을 골라보실 것.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 있는 희생자는 연쇄살인범이 말한 바 바로 ‘탐식’의 죄를 저지른 장본인이다. 그의 비대한 몸집을 보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질 것이다. 여하간 그건 그거고 여전히 위장에 가득 들어 있는 음식이 거북스럽다고? 그럼 어쩔 수 없이 먼저 그걸 비워내는 일부터 시작하는 수밖에. 소화제 역할을 대신할 영화는 별로 없어도 아쉬운 대로 구토제로 쓸 만한 것은 제법 된다.

피터 잭슨의 <고무인간의 최후>(Bad Taste, 유니콘, 1987)에 등장하는 한 시퀀스에 주목해보라. 외계인들이 큼직한 그릇 하나에 각각 자신의 입에서 나온 걸쭉한 토사물들을 가득 채운 뒤, 다시 한명씩 차례로 돌려가며 맛있게 먹는 이 엽기 시퀀스. 외계인들 사이에 위장 잠입한 지구인 특공대원 하나는 이걸 먹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중이다(그런데 결국 바닥까지 싹싹 핥아먹는 걸 보면 제법 맛있었던 모양이다). 같은 감독의 <데드 얼라이브>도 그럭저럭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강력한 약효를 두려워한 출시사쪽에서 상당부분 손질을 가해둔 터라 결과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이상은 명절날 가족과 함께 보기엔 영 어울리지 않는 영화들이란 점이 좀 마음에 걸린다. 대강 속이 편해졌다면 성찬에 들어가기에 앞서 가벼운 차 한잔으로 속을 달래보자. 웨인왕의 <뜨거운 차 한 잔>(Eat a Bowl of Tea, 1989, )을 보면서 여러분 입 안 가득 침이 고일 일은 전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잠시 동안이나마 삶의 맛과 향기를 느끼기엔 부족함이 없다.

그 나물에 그 송편, 다른 거 없수?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맛의 순례를 시작해보자. <맛을 보여드립니다>(Woman on Top, 폭스, 2000)는 뛰어난 요리솜씨와 미모로 미국 시청자들의 시선을 휘어잡는 한 브라질 요리사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다. 달콤한 연가로 감싼 이 사랑이야기를 보면서 천천히 입맛을 돋워보는 거다. 어쨌거나 요리영화는 요리영화인지라 이런저런 음식들이 몇개 소개되기는 하지만 입맛에 맞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는 좀 의문이다. 매운 요리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냥 건너뛰어도 상관은 없다. 단 요리보다 여주인공을 보면서 입맛을 다시는 이가 있다면- 영화 속 대부분의 남성들처럼- 일찌감치 방향을 돌려 다른 영화들을 찾아보기 바란다.

다음은 라세 할스트롬의 <초콜렛>(Chocolat, 우성, 2000)이다. 여기서 소개되는, 그저 보고만 있어도 군침이 도는 아기자기한 초콜릿들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게 안타깝다고? 그래 당장 가게에 가서 몇백원, 혹은 몇천원짜리 초콜릿이라도 사가지고 와야 직성이 풀리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후에 이어질 성찬들을 앞에 두고 입맛을 해치는 일은 삼갔으면 한다. <초콜렛>에서는 다음에 소개될 영화들처럼 뛰어난 요리가 사람들 사이의 금간 관계에 대한 치료제 역할을 한다. 본코스로 들어가볼까? 스탠리 투치와 캠벨 스콧의 <빅 나이트>를 보는 건 이미 다 게워낼 만큼 게워내어 속이 허한 여러분에게 맛깔스러운 고문과도 같은 경험일지 모른다. 코스별로 제시되는 이런저런 이탈리아 요리들은 영화 속 인물들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눈까지도 휘둥그레지게 만들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 성대한 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구경꾼에 불과한 우리에게는 그 대단한 맛을 즐길 권리가 없다. 형제가 만들어낸 요리맛을 보고 만족한 표정을 짓는 인물들의 클로즈업이 이토록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예가 또 있을까? 하지만 단지 그러한 이유만으로 형제에게 닥친 불행을 고소해하는 이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자, 그럼 이제 1만프랑짜리 프랑스 코스요리는 어떤지 볼까? <바베트의 만찬>(Babette's Feast, 드림박스, 1987)을 골라보자. 한때 클로드 샤브롤의 많은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던 스테판 오드랑이 수석 요리사의 경력을 가진 여인 바베트 역을 맡고 있다. 이제 <빅 나이트>를 보면서 입 안 가득 고였던 군침을 잠시 가라앉히자. 영화가 한참 진행되는 동안 나오는 음식이래야 그다지 맛있어 보이지 않는 걸쭉한 수프밖에 없으니 그럴 시간은 충분할 거다. 하지만 기다린 보람(?)은 있다. 물론 수레에 실려 부엌으로 들어오는 거북이나 메추라기 등의 요리 재료들을 보고 있노라면 다소 끔찍하단 생각이 들기도 하겠다. 하지만 멋지게 요리되어 식탁에 올라온 녀석들을 보라. 마녀의 음식이라며 음식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겠다던 마을사람들의 결심은 얼마나 무모한 것이었던지!

담배 한 모금으로 마무리

자, 이제 여러분은 포만감에 다시 배를 쓸어내리고 있을 것이다. 그저 보기만 한 걸로 무슨 배가 부르겠냐고? 설마… 그토록 탐욕스러운 당신이 영화 보는 내내 입을 가만히 놔두었을 거라고 믿고 싶진 않다. 지금쯤 다시 <고무인간의 최후>를 찾고 있다면 당신은 영락없이 <쎄븐>에 나온 살인범의 목표물이 될 자격이 있다. 하지만 적절히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미소짓는 당신에겐 추가로 행복감을 느끼게 할 담배 한 모금이 준비되어 있다. 웨인왕이 선사하는 은근한 삶의 맛을 <스모크>에서 다시 느껴보자. 하지만 당신이 오기의 담뱃가게에서 피우는 그 담배 한 모금이 속편 <블루 인 더 페이스>(Blue in the Face, 우일, 1995)에 나온 짐 자무시의 그것처럼 마지막이 되길 바란다(담배 소비를 권장, 독자의 건강을 해치는 데 일조했다는 누명을 쓰지 않으려면 이런 말을 덧붙일 수밖에).

유운성/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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