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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재수다(橫財數多)
2001-09-28

비디오 클리닉 5

처방전1 도박하다 파산했다면

언제부터인가 모르게 명절 하면 떠오르는 것 가운데 하나가 고스톱이 되어버렸다. 친지들간의 화목을 도모한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갖다댈 수도 있겠지만 명분은 그저 명분일 따름. 돈 잃고 웃음 짓는 이는 없는 법이며 한술 더 떠서 지갑에서 먼지만 폴폴 날리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보면 울화가 치미는 것이 인지상정일 게다. 그래도 인심 좋은 친지에게서 개평이라도 조금 얻어냈다면 그 돈으로 뭘 할까?

돈벼락 안 떨어지나?

도박의 귀신들이 보여주는 화려한 테크닉을 감상하면서 대리만족을 느끼길 원하는 사람들이라면 사실 홍콩산 도박영화들- <지존무상> <정전자> <도성>- 이 제격일 게다. 그러나 이쪽 영화에 취향이 각별하지 않은 사람들도 제법 있을 듯싶으니 눈을 다른 쪽으로 돌려보자. 기왕에 돈은 잃은 것이고 바라건대 어디서 일확천금이라도 주어진다면? 잠시나마 이런 몽상에 빠져 보고 싶은 사람들에겐 먼저 <웨이킹 네드>(Waking Ned Devine, 새한, 1998)를 추천한다. 불과 52명의 주민이 고작인 아일랜드의 한 마을이 들썩이기 시작한다. 네드라는 한 노인이 무려 700만파운드 가까이 되는 상금이 걸린 복권에 당첨되었으나 그만 쇼크로 죽고 만 것. 마을사람들은 단체로 모의를 하고 이 상금을 자신들이 타서 나눠갖기로 결정한다. 아일랜드의 아름다운 시골 풍광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훈훈한 이야기에 빠져들다 보면 잃은 돈 생각을 까맣게 잊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웨이킹 네드>의 해피엔딩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 그러니까 돈문제란 그렇게 쉽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대니 보일의 <쉘로우 그레이브>(Shallow Grave, 우일, 1994) 혹은 샘 레이미의 <심플 플랜>(A Simple Plan, 새롬 1998)을 권한다. 전자는 최근 들어 다소 실망스러운 행보를 보이고 있는 대니 보일의 진정한 저력을 확인할 수 있는 데뷔작이며, 후자 역시 샘 레이미가 90년대에 만들어낸 영화 가운데 최고로 꼽히기에 부족함이 없는 영화다. 둘 다 일확천금을 얻은 세명의 친구들이 결국 탐욕에 의해 몰락해가는 과정을 섬뜩하게 묘사하고 있는 수작들이다. 욕심이란 끝이 없어라. 나눠갖다 보면 언제나 남이 가진 떡이 더 커보이거나 아까운 법이다. 영화 속 인물들도 다를 바가 없어 돈을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친구를 죽이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웨이킹 네드>를 보면서 잠시나마 가져보았던 생각이 망상에 다름 아니란 걸 깨닫게 해주기엔 충분한 영화들일 것이다.

패가망신하기 전에

‘도박은 패가망신의 근원’이라며 마음을 다잡는다면. 일단 <라운더스>(Roumders, 브에나비스타, 1998)가 있다. 하지만 돈 잃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당신에게 헛된 꿈을 불어넣을 소지가 다분한 영화이니 언급만 하고 지나가기로 한다. 그래도 잠시 꿈만 꾸어 보는 게 어떠랴 싶다면 먼저 오래된 영화이기는 해도- 하지만 비디오 가게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화려한 사기꾼>(Dirty Rotten Scoumdrels, 우일 1988)을 추천할 만하다. 세계 최고의 사기꾼이 되기 위해 온갖 어려움을 마다 않고 ‘수업’까지 받는 스티브 마틴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일확천금이 그저 거저 주어지는 것을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영화를 보는 동안 입가에 내내 머물던 미소를 거의 폭소로 바꾸어줄 만한 재치있는 반전까지 준비되어 있다(그러나 이 영화를 아직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비밀로 묻어둔다). 좀더 직접적으로 도박을 다루고 있으면서 반전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영화는 없느냐고? 이런 사람들을 위해 준비된 영화가 바로 데이비드 마멧의 최고 걸작 <위험한 도박>(House of Games, 드림박스, 1987))이다. 영화의 내용을 구구절절 읊조리는 건 감상의 재미를 한참 떨어뜨릴 게 분명하니 삼가기로 한다.

다만 문제는 출시된 지가 오래되어 비디오를 찾기가 썩 쉽지 않다는 거다. 아쉬운 대로 반전을 즐기면서 도박 즐기다 인생 망친다는 교훈을 얻기에 부족함이 없는 다른 영화를 찾아볼 수도 있다.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의 가이 리치가 만든 <스내치>(Snatch, 콜롬비아, 2000)가 바로 그것이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많은 인물들이 얽히고 설킨 가운데 다이아몬드를 놓고 벌어지는 한바탕 소동극이다. 무엇보다 도박이라면 사족을 못 쓰다 손가락 잘리고 결국 머리에 총알구멍이 난 채 시체마저 수난을 당하는 처지에 이르는 베니치오 델 토로에 주목하라. 하지만 혹시 아는가? 영화 속 두 주인공들처럼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세상에 몸을 내맡기다보면 마지막엔 축복이 내릴는지?

혹은, 공수래 공수거

돈은 무슨 돈이냐며 결국 인생이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 아니겠느냐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디 돈 없이도 살 만한 데 없을까? 톰 행크스가 주연을 맡은 <캐스트 어웨이>(Cast Away, 드림웍스, 2000)를 보다보면 그게 꼭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겠지만 그만큼 고통도 따른다는 걸 알게 될 것 같다. 같은 제목의- 그러나 띄어쓰기는 다른- 니콜라스 뢰그의 <캐스터웨이>나 피터 위어의 <해리슨 포드의 대탐험>(The Mosquito Coast, 우진, 1986)도 추천할 만한 영화들이다. (화질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캐스터웨이>는 제쳐두기로 하고) <해리슨 포드의 대탐험>에는 문명사회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가족과 함께 정글로 들어가 낙원의 건설을 꿈꾸는 한 이상주의자가 나온다. 영화는 그의 이상이 필연적으로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묻는다. 그리고 그 실패의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쯤 되면 무산(無産)의 삶이라는 여러분들 최후의 희망도 산산이 무너져내릴 것이다.

이상의 비디오 순례를 거치고 나서 결국 다시 고스톱판으로 되돌아간다면? 영화 속 인물들처럼 대단한 도박을 벌이는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일까,라고 생각하다가 나중에 후회하지 말 일이다. 잠시 고스톱판을 접어두고 친지들과 함께 저녁 산책이라도 나가 담소를 나눠보는 건 어떨까? 일년에 몇번 찾아오지 않는 흔치 않은 기회가 아닌가? 그건 100편의 영화를 보는 것보다 가치있는 일일 것이다.

유운성/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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