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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여기` 있었지 (2)
2001-09-29

상실의 연가 <봄날은 간다>로 돌아온 허진호 감독에 관한 소고

너무 명백하고, 지나치게 의미심장한

인물의 김정과 움직임을 하염없이 응시하는 연출은, 그러나 일부 숏의 길이를 애매하게 만들기도 했다. 다소 길을 잃고 연장된 듯 보이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은수가 술 취해 퇴근한 날 밤의 승강이처럼 좀더 끌어줬으면 싶은데 덜컥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봄날은 간다>를 로 부터의 진전이라고 부르기에는 정당한 망설임이 따른다. <봄날은 간다>는 관습적 멜로드라마의 평탕한 대로를 외면하지만, 데뷔작에서 이미 확고한 영화적 비전을 내비친 감독의 두 번재 작품으로는 상당히 안전한 길을 택했다. 유지태와 이영애의 캐스팅을 빼고도 <봄날은 간다>는 영화 내적으로 꽤 많은 확실한 패를 소매 안에 숨기고 게임을 한다.동시녹음 엔지니어라는 주인공의 직업, 세대를 가로지르는 삶의 교감을 대변하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라는 인물 설정은 지나치게 의미심장하고 상우네 식구들이 사는 정겨운 변두리 한옥은 너무 명백하게 소멸과 향수의 정취를 낸다. 반면 두 연인이 부여안고 떨어지고 때로는 외로이 한쪽에 웅크리는 공간, 은수의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은 바닷가 조그마한 아파트는 멜로드라마의 공간으로서 참신함을 보여준다. 계절과 가족과 사랑이 소도시의 거리에서 녹아들어 조금씩 관객에게 다가오던 에 비해 <봄날은 간다>에서 가족과 연애의 공간은 잘 골라져 묶였다는 인상을 남긴다.그러나 허진호 감독을 작가로 칭하느냐 아니냐의 의논은 전혀 급할 게 없는 일이다. 이제 막 봄날을 보낸 그에게는 여러 계절이 남아있다. 그보다 <봄날은 간다>가 확인시키는 엄연한 사실은 허진호 감독이 놀랄 만한 대중적 호소력을 보존한 채, 자기 미학에 정직한 스타일과 생을 해석하는 사적인 비전을 관철시킬 수 있는 행복한 감독이라는 점이다. 많은 연애에서 약자였으나 그 패배의 기억을 좀처럼 스크린에서 볼 수 없었던 남성의 입장에서 이별의 뒤안을 살핀 <봄날은 간다>의 얼개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허진호 감독의 감수성에는 선천적인, 그래서 아마 수명도 길 상업적 저력이 잠재해 있다. 가 일본에 소개된 뒤 평론가 요모타 이누히코는 <키네마순보>에 "홍상수나 허진호가 체현하는 미니멀리즘은 과거의 '설교적' 영화에 대한 비평이다. 일본에서 이들과 평행하게 나타난 작가로 이와이 순지나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들 수 있다"고 썼다. 마치 1970년대 미국감독들이 유럽 예술영화의 어법을 습득해 할리우드의 장르영화를 한층 효과적이고 강렬한 존재로 만들었듯이, 허진호 감독은 멜로드라마의 품을 넓히고 향을 더하고 있다. 자신보다 앞서 걸어간 이명세 감독보다는 느긋한 손길로, 홍상수 감독보다는 온건한 시선으로."무엇인가가 자꾸 통과해가는 영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가 평론가 시노다 마사히로의 말처럼 "무엇인가가 자꾸만 사라져가는 영화"라면, 허진호의 영화는 '무엇인가가 자꾸 통과해가는 영화'다. 그의 영화에서는 계절이, 사랑과 죽음이 야트막한 담을 넘어 들어와 툇마루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다가 뒤뜰로 면한 창을 열고 멀어져 간다. 영화세계의 넓이와 폭은 각기 다를지언정, 허진호의 영화에서 어쩔 수 없이 오즈 야스지로, 허우샤오시엔, 에드워드 양의 그림자를 보는 것은 그의 러브스토리 속에 체념하되 결코 냉소하지 않는 아시아 거장들의 휴머니즘적 전통이 푸른 그늘을 드리우고 있기 때문이다.<동년왕사>의 소년은 고단한 평생을 병으로 마감한 부모와 개미가 끓을 때까지 죽은 채로 누워 계셨던 할머니를 보낸 뒤, 할머니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땄던 과일들을 떠올린다. <동경이야기>의 늙은 아버지는 멀어진 자식들의 집을 순례한 뒤 "좋지는 않지만 좋은 편이었어"라고 되뇐다. 의 정원은 사랑도 언젠가 추억에 불과함을, <봄날은 간다>의 상우는 "뭔가 간절히 바라도 다 잊고 그러는" 쓸쓸한 섭리를 수긍한다. 그들은 모두 이생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실망임을 안다. 그리고 환하게 미소 짓는다.화사한 봄날은 가고 이제 다시 태엽을 감아야 할 때. 다음 영화가 어떤 생김새일지 몰라도 인물과 사물에 대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것이고, 일상의 빛나는 순간들을 예쁘지만은 않게 잡아낼 것이라고 띄엄띄엄 들려주던 허진호 감독은 무엇을 하든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나는 그렇게 낙관적인 사람이라고 문득 말을 맺었다. 세 번째 영화에서도 허진호 감독은 삶의 더딘 시긴을 새기는 모래시계를 뒤집을 것이고, 어떤 이는 채워지는 반족을 보며, 어떤 이는 비어가는 반쪽을 보며 미소지을 것이다. 은수를 보내고 보리밭의 바람 속에서 눈을 감은 채 귀를 기울이던 상우처럼.김혜리 vermeer@hani.co.kr. 사진 손홍주 lightson@hani.co.kr

▶ 허진호와 <봄날은 간다> (1)

▶ 허진호와 <봄날은 간다> (2)

▶ 허진호의 낱말풀이

▶ <소름>의 감독 윤종찬, 허진호를 만나다 (1)

▶ <소름>의 감독 윤종찬, 허진호를 만나다 (2)

▶ <소름>의 감독 윤종찬, 허진호를 만나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