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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 반려물건(伴侶物件)

나에게 반려동물(伴侶動物)은 없지만 반려물건(伴侶物件)은 있다. 내게는 너무도 소중한 빨간색 엠피스리(MP3) 플레이어, 그것이 언제나 내 곁을 지키는 반려물건이다. 우리는 2006년에 만났다. 그해 최고의 구매는 MP3였고, 최악의 구매는 디지털카메라였다. 그리하여 서른다섯에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내가 정말로 사랑한 것은 역시나 음악이었다고, 소리에 매료되니 ‘그놈 목소리’에 집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MP3 플레이어는 한 시간이 넘는 출퇴근길의 성실한 동반자요, 님들을 만나러 가는 여행의 유일한 동행이다. 그분을 만나고 못 만나는 일은 하늘의 뜻이지만, 그분을 못 만나도 그것이 있으니 위로가 없진 않았다. 집을 나서서 처음으로 꺼내고, 집에 도착해 마지막으로 가방에 넣는, 나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 그래서 휴대폰이 없으면 불편하지만, MP3 플레이어가 없으면 불안하다. 불만은 위로받지 못하고,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번잡한 길에서 이어폰을 꽂으면 아늑한 고립이 찾아오고, 비로소 개인이 됐다는 안도가 밀려든다. 그렇게 MP3가 만드는 고립감을 나는 사랑한다. MP3 덕분에 나의 머나먼 귀가는 때때로 아늑해졌다.

그들의 목소리에 기대어 견뎌낸 날들도 있었다. MP3 플레이어만 있으면 복잡한 지하철도 때로는 댄스 플로어로 변했고, 버스는 누군지 모를 절대자에게 경배하는 예배당으로 바뀌었다. 지하철에서 셰어 누님이 근엄하게 “Do you believe in love after love?”라고 물으면 고개를 숙이면서 믿음을 고백했고, 카일리 언니가 “Your Disco needs you~”라고 지엄하게 명령하면 남들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살며시 엉덩이를 흔들었다.

R.E.M. 오빠들이 “Losing my religion~”이라고 읊조릴 때 하마터면 버스에서 무릎 끓고 ‘나도 그렇다’고 고백하며 울먹일 뻔했다. 이렇게 MP3 플레이어는 타임머신이었다. 10대의 내게는 워크맨에 꽂을 테이프를 살 돈은 있었지만, 20대의 내게는 CD 플레이어에 돌릴 CD를 살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 90년대 음악은 나에게 공백으로 남아 있다. 버튼만 누르면 음악이 맘대로 바뀌는 MP3 플레이어는 90년대 음악을 단기집중 복습하게 해주는 타임머신이다. 마돈나의 전성기로, 시애틀 그런지의 세계로. 때때로 80년대 회고전도 열린다. 최근엔 이선희의 발라드와 들국화의 노래들을 들었다. 들국화는 시들했고, 이선희는 감미로웠다. 그토록 무시했던 이선희가 좋아지고 내 청춘의 들국화가 시들하다니, 내 귀를 의심했다. 이렇게 반려자는 취향의 무상함도 가르친다. 친구는 친구도 소개했다. 평생 친해지기는 힘들겠다고 단념했던 힙합음악도 친구로 만들어주었다.

완벽한 귀가란 먼저 심야의 좌석버스에 몸을 파묻고, 반드시 MP3를 들으며 돌아가는 길이다. 좌석버스의 좌석에 몸은 적당히 은폐엄폐되고, 시야는 앞좌석에 비스듬히 가려지고, 옆좌석에는 아무도 없어야 한다. 그리고 MP3에서는 익숙한 음악이 흐른다, 나는 아늑함에 취한다. 이대로 영원히 갔으면 좋겠다, 간절히 바란다. 너무나 피곤해 살포시 잠들고 싶으면 영어를 듣는다. 이렇게 MP3 플레이어만 있으면 도시의 어디든 온전히 자기만의 방이 생긴다. 누가 뭐래도 MP3 플레이어와 러닝머신의 궁합은 완벽하다. 나는 파블로프의 개일지도 모른다, 달리면서 생각한다. 달리기엔 반드시 응원가가 필요하다. 시계를 보면서 달리면 30분은 힘겹지만, 30분을 노래 예닐곱곡으로 생각하면 괴로움은 반감된다. 비욘세가 노래하면 다리가 반쯤은 저절로 움직인다. 정말로 파블로프의 개 같잖아, 혼자서 푸념해도 고맙기 그지없다.

가끔은 듣고 또 듣는 노래가 지겹지만, 쉽사리 작별을 고하지 못한다. 신변을 정리하듯 파일을 확 바꿔버려야지 했다가 차마 확 바꾸진 못한다. 정든 언니들과 작별은 그렇게 어렵다. 간미연 언니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일품인 베이비복스의 <나 어떡해>를, 채연 누나의 슬픈 댄스곡 <오직 너>를, 내가 어떻게 지우느냐 말이다. 이렇게 MP3에는 취향이 숨겨져 있고, 역사가 들어가 있다. 무릇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는 정부라면, 전국의 청소년에게 MP3 플레이어를 무상으로 배포해 정서함양에 애써야 함이 옳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