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ovie > 무비가이드 > 씨네21 리뷰
이성강의 두 번째 보석, <천년여우 여우비>
김도훈 2007-01-24

거친 세공의 흔적이 못내 야속한 이성강의 두 번째 보석.

여우비(손예진)는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 ‘요요’들과 함께 살고 있는 백살짜리 구미호다. 어느 날 고향별로 돌아가기 위해 요요들이 만든 우주선이 시험 비행에 실패해 또다시 불시착하고, 이에 책임을 느낀 말썽꾸러기 ‘말썽요’가 마을로 내려갔다 폐교에서 극기훈련 중인 아이들에게 붙잡히고 만다. 여우비는 말썽요를 구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학교에 입학하는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한다. 갓 사춘기가 된 여우비가 황금이(류덕환)라는 남자 아이에게 연정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인간들의 삶에 적응해 즐거운 날을 보내던 여우비의 행복도 잠시. 그림자 탐정이라는 미스터리의 인물과 구미호 사냥꾼이 동시에 나타나 여우비의 뒤를 쫓기 시작한다.

<천년여우 여우비>는 2002년작 <마리이야기>로부터 5년 만에 돌아온 이성강 감독의 두 번째 장편애니메이션이다. 상업적인 감각을 좀더 발휘한 <천년여우 여우비>는 기술적 완성도의 면에서도 전작보다 낫다. 3D 레이아웃 기법을 적재적소에 사용해 만든 캐릭터의 움직임과 미장센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색감은 (전작만큼 몽환적인 매력은 없지만) 깔끔하게 통제되어 있다. 특히 그림자 탐정이 등장하는 몇몇 장면들은 눈이 호사스러울 정도. 캐릭터는 거침없이 달리고 카메라는 프레임과 관객의 상상력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역동감이 부족했던 <마리이야기>를 떠올려본다면 <천년여우 여우비>야말로 이성강의 본격 상업애니메이션 감각의 전시장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사실 2006년의 <아치와 씨팍>을 거쳐 <천년여우 여우비>에 이른 지금, 한국 애니메이션의 기술적 발전을 상찬하는 것은 더이상 의미가 없다. 기술적인 토대는 충분하다. 문제는 이야기다. 확실히 <천년여우 여우비>의 시나리오는 좀더 세심한 영화적인 퇴고가 필요했을 법하다. 관객을 사로잡는 소박한 이야기는 중반을 지나면서부터 수많은 캐릭터들을 집어삼킨 채 결말을 향해 달음박질치고, 몇몇 조연 캐릭터들은 내러티브를 위해 희생되거나 오직 그림을 만들기 위해서만 삽입되어 있는 듯 느껴진다. 가끔은 부산스러운 이야기와 캐릭터를 향해 마리처럼 느긋하게 화면에 머물러달라 요청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이성강 감독은 <천년여우 여우비>를 통해 다시 한번 강렬한 비주얼리스트로서의 재능을 입증하지만 실사영화 <살결>로 보여줬던 내밀한 이야기꾼으로서의 면모는 아직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회의론자들의 예리한 눈동자마저도 <천년여우 여우비>의 원석이 비추어내는 빛을 온전히 부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