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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역지사지
최하나 2007-02-09

미국 TV드라마 <고스트 앤 크라임>의 주인공 알리슨은 죽은 이들과 대화하고, 영혼을 읽어내는 특수한 능력으로 범죄 수사의 자문 역할을 한다. 꿈을 통해 피해자의 메시지를 수신받곤 하는 그녀는 종종 그들의 위치에서 사건을 체험한다. 단지 사태의 전말을 파악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고통과 두려움, 아픔 전부를 자신의 것인 양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고스트 앤 크라임>에는 알리슨 이상으로 비범한 인물이 있다. 바로 남편으로 등장하는 조 드부아다. 매일같이 새벽 3시에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는 아내에게 “잠 좀 자자” 짜증을 부릴 법도 하건만, 그가 건네는 첫마디는 언제나 “무슨 일이야? 괜찮아?”다. 자전거 헬멧을 쓴 채 먹고, 자고, 학교를 가는 둘째딸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속이 타오를지언정 강제로 헬맷을 벗기려 하지 않는다. 악몽에 시달리는 아내의 고통과 새 헬멧을 향한 딸의 귀여운 애착을 헤아리는 그는 어떤 초자연적 능력도 갖고 있지 않지만, 상대방의 마음에 접근하는 법을 안다.

누군가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 영어에서는 ‘남의 구두를 신는다’(in her/his shoes)는 표현을 쓴다. 자기 발에 맞지 않는 구두는 얼마나 불편한가. 다른 사람의 처지에 자신을 놓아본다는 것은 편치 않을뿐더러 쉽지도 않은 일이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종종 자신의 작은 생채기에는 예민하게 반응하면서도, 타인의 가슴에는 무심하게 상처를 입히곤 한다. 지난해 여름 오랜 백수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회사원이 된 친구가 얼마 전 전화를 걸었다. 일은 재미있고, 사내 분위기도 대체로 좋단다. 그가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한 사람과의 관계였다. 업무로 인한 마찰이라면 차라리 이해를 하겠으나, 별다른 이유도 없이 늘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휴일근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면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잘됐지 뭐”라며 비아냥거리고, 무언가를 물어보려 하면 “넌 꼭 내가 바쁠 때만 오더라?” 하며 짜증을 부리는 식이다. 사소하다면 사소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일들이 하나둘 쌓이다보니 이제 그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조차 불편해져버렸다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대화를 할 때 오가는 것은 말뿐만이 아니다. 어투, 표정, 몸짓 등 서로에게 발산하는 신호는 다양하고 복합적이다. 보내는 이와 받는 이의 신호가 어긋나고, 오독될 가능성은 무수히 많다. 솔직히 그 모든 것에 일일이 신경을 쓰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최소한의 배려는 필요하지 않을까. 누군가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대체 왜 그러는건데?”라고 몰아붙이는 대신 “그러면 일이 어려워지잖아”라고 말을 건넬 수 있는 것처럼, 같은 의미라도 담아낼 수 있는 형식은 다양하다. 아주 잠깐이라도 눈앞에 선 사람의 마음을 살펴볼 시간을 갖는다면, 공격적인 말을 부드럽게 바꾸는 것은 어렵지 않다. 분명한 것은 1%의 차이가 누군가의 하루를 즐겁게 만들 수도, 불쾌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알리슨은 될 수 없지만, 조는 될 수 있다(참고로 조를 연기한 배우는 제이크 웨버이며, 현재 나의 ‘이상형!’이다). 남의 구두는 확실히 불편하다. 하지만 가끔씩 신어볼 필요는 있다. 걸음걸이가 달라질 것이고, 공기의 맛이 달라질 것이고, 세상을 보는 눈도 조금은 달라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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