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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 눈물 흘릴 때, <황금 눈에 비친 모습>

EBS 2월10일 밤 11시

장편 데뷔작인 <말타의 매>에서부터 존 휴스턴을 사로잡았던 건 어두운 허무주의로 채워진 남자들의 세계였던 것 같다. 그는 기본적으로 누아르에 각별한 애정을 쏟았지만, 그가 완성한 수많은 작품들은 여러 장르를 오간다. 누아르뿐만 아니라, 전기영화인 <물랑루즈> <프로이트>, 혹은 소설을 각색한 <백경>, 심지어는 007 시리즈까지 그의 행보는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그런 만큼 작품의 완성도나 흥행성적도 부침이 심한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장 즐겨 다루고, 어쩌면 가장 잘 형상화했던 것은 강인한 이미지의 남자들을 지배하는 음울한 정서일 것이다. 그는 갱단의 두목이나 군인처럼 남성성으로 무장한 인물들에게 편집증 혹은 강박증적인 내면을 부여하여 행동보다는 심리로 극을 이끌어가는 데 능숙한 재능을 보인다.

<황금 눈에 비친 모습>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이 작품은 휴스턴의 전작들로부터 조금 벗어난 듯하지만, 극의 흐름을 온전히 인물들의 팽팽한 심리적 갈등에만 맡긴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94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은 동성애적 욕망과 불륜을 소재로 미국 부르주아 가정의 균열을 포착한다. 휴스턴은 이를 사회적 차원으로 접근하지 않고 지극히 사적인 심리의 흐름을 통해 전달하고자 한다. 직업군인인 웰던(말론 브랜도)은 아내 레오노라(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불륜을 눈치챈 지 오래다. 그러나 정작 그를 괴롭히는 것은 그의 내면을 지배하는 동성애적 욕망이다. 레오노라는 남편의 동료인 모리스와 사랑하는 사이고, 웰던의 부하 군인인 윌리엄스는 남몰래 레오노라를 흠모하며, 웰던은 윌리엄스에 대한 욕망을 억누르지 못한다. 여기에 우울증을 앓고 있는 모리스의 아내까지 가세하면 이 영화는 그야말로 개별 심리의 실타래로 엮이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인물들의 심리가 이토록 얽혀도 욕망은 줄곧 억압되고 은폐되기 때문에 이들의 실제적인 관계에서는 아무런 변화가 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심리가 드러나는 유일한 순간은 어둠 속에서인데, 여기서 휴스턴의 스타일이 극대화된다. 그는 인물들의 대사보다는 그들이 위치한 공간적 속성, 빛과 어둠의 대비, 말이나 거울처럼 인물의 심리를 간접 투영할 수 있는 대상의 묘사에 공을 들인다. 그래서 대부분의 장면들에서 인물들이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는 방식은 문틈으로, 혹은 창문으로 상대를 훔쳐보는 것이다. 영화 전반을 메우는 세피아 톤은 이 끈끈하고 음울한 심리를 담아내는 데 더없이 적절한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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