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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 세상을 보는 흐리멍덩한 눈
권리(소설가) 2007-02-16

김지운 감독의 <숏컷>을 읽다가 재밌는 내용을 발견했다. 서유럽을 여행하면서 그에게 가장 인상적인 것이 완전히 맑게 풀린 서양인들의 ‘눈’이었다는 것이다. 우연찮게 <Pale blue eyes> 라는 노래도 생각나고, 과거에 만난 서양 친구들의 흐리멍덩한 눈도 떠올라 모처럼 깔깔 웃었다. 동시에 서양인들은 한국인들과는 차원 다른 교육을 받고 사는 것이 아닐까도 생각해보았다(예문: 다니엘, 눈에 힘 좀 풀고 다녀! 무슨 어린애가 두눈 똑바로 뜨고 다니니? 눈빛에 베겠다!).

잘나가는 할리우드 배우들만 봐도 확실히 눈이 풀려 있다. 스칼렛 요한슨이 대표적으로 그렇다. 그녀의 눈은 몸매나 입술에서 풍겨지는 섹시함을 압도한다. 퇴폐적이고 침침해 보이는 듯하면서도, 그 흐리멍덩함 속에 묘한 집중력을 갖고 있어 사람들의 시선을 당기는 힘이 있는 눈. 마치 시력검사를 할 때 “멀리 보세요!”란 말에 반응하는 사람의 눈처럼 아득해 보인다. 한국인에게 잘 없는 눈이다. 나만 해도 늘 ‘눈에 힘 똑바로 주고 다니지 않으면 누가 코를 베어갈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듣기만도 수백번, 귀에 못이 박혀 이젠 액자를 걸어도 될 정도다(물론 예외도 있다. 예전에 할머니가 치매에 걸려 돌아가시기 직전의 눈이 그랬으니까).

10살 무렵에 겪은 눈에 관한 일화가 있다. 학교 앞 다리 밑에서 두명의 맨인블랙이 두 다스가량의 아이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어린이 여러분, 입은 꾹 다물고 아저씨 눈을 똑바로 보세요! 가장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어린이에게 이 장난감을 공짜로 줄거예요!” 다행히 어린 시절, 나는 눈에서 레이저빔이 나오는 초능력이 있었다. 난 10년간 갈고닦은 초능력을 완벽히 발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레이저빔이 너무 세서 눈에서 정말이지 피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고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몇몇 반칙왕들은 ‘저요, 저요!’ 하면서 손까지 들었지만, 난 끝까지 눈만 뜨고 있었다. 하지만 맨인블랙 자식들은 내 눈빛을 외면했고, 코 묻은 돈과 팔다 남은 장난감을 수거해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그 이후로 난 눈빛 내공이 부족한가 싶어서 매일 저녁 눈을 찬물로 씻었다. 안경을 안 끼고 거울을 보면, 미스코리아대회에 나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눈이 맑았다. 세상에는 모 아니면 도, 최고 아니면 최저, 100점 아니면 0점의 사람들만 있었고, 개나 걸, 60점이나 70점은 흐리멍덩한 인생의 낙오자처럼 보였다. 눈에 힘주고 열심히 살아가던 내게 어느 날 위기가 찾아왔다. 이유도 없이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졌고 인생에 대한 회의가 들게 된 것이다. 힘들다는 핑계로 4개월 이상 방 청소를 하지 않고 환자처럼 침대에 누워 흐리멍덩하게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갑자기 창문 밖으로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이해가 되지 않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다 의미가 있는데, 왜 사람들은 ‘세상을 보는 정확한 눈’만을 의미있게 보는 것일까. 한번도 ‘세상을 보는 흐리멍덩한 눈’ 따위의 광고 카피를 보지 못한 게 신기하지 않은가.

눈도, 삶의 방향도, 목표도 전부 흐릿해진 순간 새로운 현상이 일어났다. 흐리멍덩한 눈을 갖게 된 것이다. ‘흐리멍덩한 눈’이란 건 불법적이고 개념 상실에다가, 다크서클이 드리워진 퀭한 눈을 뜻하는 건 아니다. 타인과 타인의 것을 필요 이상으로 경계하지 않는 ‘무방비 상태의 눈’을 말한다. 얼마 전 한 가수의 자살로 인해 악플 논쟁이 거세지고 있다. 악플이 또 다른 악플을 낳고 심지어 악플 책임론을 주제로 토론하는 방송마저 나왔다. 하지만 언론에 보도되는 것처럼 ‘악플’이라는 구체적인 이유 때문에 죽는 사람은 없다. ‘성적 비관’, ‘빚’, ‘애인 변심’ 등 신문 편집 기자들의 머리에서 태어난 ‘주제어’들은 나중에 네티즌의 ‘검색어’로 죽게 될 운명일 뿐. 자살에 있어 대표적이고 명확한 이유란 없다. 세상은 그렇게 명확하거나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악플러들의 똘망똘망한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엔 너무나 많다. 넉넉하고 여유있게 사물을 보는 흐리멍덩한 눈들이 세상엔 절실하게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