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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도덕적 감정

<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는 현대 경제학의 창시자로 기억된다. 하지만 살아생전 그를 유명하게 만든 책은 <국부론>보다 17년 먼저 나온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이다. 그가 대학 시절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은 도덕철학자인 해치슨이다. 교수 생활도 해치슨의 후임으로 도덕철학 강의를 하면서부터이다. 효용을 최대화하는 것을 선(善)으로 보고 합리적 계산을 과학으로 생각하는 현대 경제학의 아버지가 ‘도덕감정’에 대한 이론을 남겼다는 것은 꽤나 인상적인 사실이다. 그는 이 책에서 도덕적 행위는 이해관계를 떠난 관찰자의 위치에서 타인에 대한 공감의 능력에서 비롯된다고 봤다. 타인의 행위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에 앞서 먼저 그 처지를 공감하는 능력(sympathy)이 선행의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타인에 대한 공감 중에서도 특히 고통에 공감하는 동고(同苦)의 능력을 도덕적 감정의 핵심으로 꼽았다. 말하자면 도덕적 행위를 동정과 연민이 행동으로 실현된 것으로 봤다.

인간의 행위 중 자신의 이익으로 환원되지 않는 순수한 이타적 행위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이 오랜 도덕철학의 질문에 가장 많은 동의를 얻고 있는 답변은 연민과 공감이다. 타인의 처지에 대한 감정이입의 능력이 도덕적 행위를 낳는다는 것이다. 미국의 여성 도덕철학자 마사 너스바움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떻게 하면 연민과 공감의 능력을 키울 수 있는지를 질문했다. 그가 로스쿨에서 강의한 내용을 요약한 ‘시적 정의’(poetic justice, 1995)는 문학적 상상이 도덕적 감정을 키우는 밑거름이 된다는 주장을 한다. 유년 시절의 문학적 판타지가 성인이 되어서 도덕적 행위로 이어질 개연성이 높으며 에누리 없는 합리성은 공감의 기제가 없기 때문에 도덕적 감정이 형성되지조차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사회적 정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판관과 시인이 일신동체(一身同體)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개인의 도덕적 행위는 물론 사회적 정의를 위한 법의 적용에도 타인의 처지를 이해하는 공감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거다. 얼마 전 사직한 금태섭 검사가 그런 드문 법조인이 아니었나 싶다. 그가 <한겨레>에 연재하다 중단한 ‘수사 제대로 받는 법’ 시리즈는 법을 집행하는 검사가 수사받는 사람의 처지에 공감한 결과 나온 글이다. 도덕 교과서에서 도덕적 행위의 기본으로 권장하는 타인에 대한 감정이입의 결과가 검사직의 사직으로 이어졌다니 참 씁쓸하다. 연민과 공감의 감정이 전문직 집단의 편의와 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조직의 직업 논리에 의해 가차없이 거세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는 얘기가 아닌가.

7년을 끌어왔다는 ‘담배소송’ 판결도 씁쓸하긴 마찬가지였다. 담배인삼공사를 제소한 폐암 환자의 손을 들어주면 그 많은 폐암 환자들이 줄줄이 소송을 낼 것이니, 이 재판은 처음부터 결론이 예정돼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러니 이 상황에서 현명한 판결이란 폐암 환자의 청구를 기각하는 적당한 논거를 찾는 것에 다름 아닐 터이다. 그렇게 지혜를 짜내 사법부가 내놓은 논거는 ‘발병과 흡연의 개별적 인과관계 불인정’, ‘흡연은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라는 거다. 폐암 전문의 대부분이 흡연을 폐암의 1원인으로 생각하고 금연 클리닉의 팸플릿은 흡연은 자유의지지만 금연은 중독과의 힘든 싸움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럼에도 애써 이 사실을 외면하는 것은 “담배를 끊지 못하는 의지박약으로 인한 죽음은 사회가 책임질 일이 아니다”는 싸늘한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담배를 끊으라. 그게 싫으면 폐암이 담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네가 입증해봐라.” 이 판결은 그런 뜻 같다. 흡연자로 초점을 돌려 담배 파는 자에 대한 판단을 피해가는 판결, 흡연자의 의지박약에 엄격하고 담배회사의 구조적 악행에 관대한 판결, 담배산업을 위해 흡연 폐암 환자의 절반의 발언권(담배를 피운 내 잘못도 있지만 마리화나보다 중독성 강한 일종의 마약을 판매한 국가도 잘못이 있다는)을 침묵시킨 판결! 노스바움이 이상적인 법관으로 제시한 도덕적 감정으로 충만한 시적 판관이었으면 과연 어떤 판결을 내렸을까? 우선 흡연자가 아닌 담배회사의 절반의 잘못에 주목하지 않았을까? 그리하여 담배회사의 문을 닫게 만들 판결에 대해 스스럼없이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그 현실적 파장에 지레 겁먹기 전에 말이다. 사법고시에 문학적 감수성을 평가하는 과목이 있었다면 판결이 달라졌을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