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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기저귀 빨며 일본인에게 영화를 배웠지
2001-10-10

한국영화 최초의 조명기사 김성춘(金聖春·1904∼77), 배우를 꿈꾸다 조명기사가 되기로 결심하다

초창기 한국영화에서 조명은 아무나 조명기를 들고 빛을 비추기만 하면 되는 단순한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김성춘은 이러한 미개척 기술분야에 ‘새로운 빛’을 밝힌 최초의 한국인 조명기사다.

한국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연쇄극 <의리적 구투>를 보고 기술 연구의 필요성을 느긴 김성춘은 조선에 순회공연 온 일본의 천승좌(天勝座)를 따라 일본에 건너갔다. 일본 동아(東亞)키네마에서 조명기술을 배운 후 일본 제국(帝國)키네마와 신흥(新興)키네마, 불이야(不二屋)프로덕션에서 활동했다. 1935년에 귀국하여 만든 첫 작품 <살수차>에서 각색·조명·주연을 맡았는데, 이 영화는 처음으로 80KW의 조명기를 사용하여 크게 화제가 되었다. 1936년에는 조선영화주식회사에 입사하여 조명부장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 사재를 털어 한국영화기술협회(1955)를 설립했고, 한국영화제작공사(1961)를 설립·운영하기도 했다. 특히 사재를 털어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1961)을 제작하면서 작품의 주제와 예술성에 중점을 둔 것은 기억할 만하다.

이영일 선생과의 대담에서 그는 조명기술의 전파 경로를 비롯한 초창기 한국영화계의 전반적인 제작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평소 김성춘의 제자들이 그를 “오야지”(일본말로 정다운 아버지라는 뜻)로 부른 데서 알 수 있듯이, 일찍이 일본에 건너가 조명기술과 기재를 도입·전파한 김성춘은 영화를 빛의 예술로서 자리잡게 한 주역 가운데 한명이다.우리도 배우면 저런 걸 만들 텐데

저희 아버지께서 서울로 올라와서 자수성가를 하실 때, 지부동에서 제가 났어요. 그런데 일한합방(1910년- 필자)이 되면서 거기서 있질 못하고 이사를 했어요. 저희 영감님이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우시는 거예요.

그렇게 있다가 나이가 들면서 대정 5년(1916)에 창신공립보통학교 2년을 올라갔는데, 하도 멀어서 말이죠, 나막신을 신고 산 속을 넘어 다니는 길도…. 그러니까 어르신네가 “이러지 말고 시내로 학교를 옮겨라” 그래서 인현공립보통학교를 다녔어요. 열네살인가? 정말 갑니다(기억이 혼란스럽다는 뜻- 필자). 나이가 하도 먹어서. (웃음) 거기를 나와 가지고 말이죠. 집안이 가난하니까 할 도리가 없어서 낮에는 잡일하고 밤에는 배화동 야학 교과실습학교를 들어갔어요. 그때 거기를 2년 졸업을 하고(1919년에 수하상과실업학교를 졸업했다- 필자).

그걸 하면서 공립학교 때부터 연예 관계를 대단히 좋아했어요. 어르신네한테 집안 망한다고 몽댕이로 맞고 밤낮 그랬거든요. 그러면서도 연극도 잘 보러 다녔어요. 그 당시에 김도산(극단 <신극좌>를 창설하고 1919년에는 단성사를 기반으로 최초의 연쇄극 <의리적 구투>를 제작, 공연했다. 이 작품은 흔히 한국영화사의 출발점으로 꼽힌다- 필자)이가 거기서 인화 일 하고 이랬거든요. 구경을 다니면서 일본영화나 외국영화 많이 봤어요. 우리나라 사람도 좀더 배워와서 연구를 하면 저런 것을 맨들 수가 있을 텐데, 하는 욕망이 참 생기더군요. 그래서 단성사에 처음으로 김도산씨가 한 연쇄극을, 박승필씨가 사장이 됐을 당시에 구경 갔드랬어요. 나도 어떻게 일본에 가서 연구를 해가지고 한번 해봐야겠다 맘먹었어요. (“그게 <의리적 구투>였나요?”- 대담중의 이영일) 그게 한국에서 한국사람이 만든 1호라는 것이지요. 한국영화 40년사가 그거를 토대로 해서 연배를 세 가는 거니까.

일본에서 이규환과 함께 도시락 먹고

어렸을 때부터 아마추어지만 스포츠를 좋아했습니다. 축구도 하고 특히 야구를 곧잘 했어요. 그런데 덴까스(天勝座)가, 일본서는 제일 가는 연극 단체죠, 여기 와서리, 무용, 마술도 하고 야구도 했어요. 서궐(西闕)운동장에서 야구하는데 사람이 모자라니깐, 나더러 나와달라고 해서 나갔어요. 거기 있는 놈보다 내가 좀 낫거든요. 덴까스 회사가 야구를 하면서 경도(교토)까지 갔어요. “나도 영화를 맨드는 기술을 배우고 싶다. 그러니 어따 하나 좀 소갤 해다오” 그랬죠. 근데 내가 조선사람이기 때문에 말이지, 어디에 제자로 들어가는 게 힘들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당시에 일본 톱스타 다카다미 요루한테 소개를 했어요.

그 자당 되는 분이 어찌나 엄격하고 이런지 말이지. 앉는 법이든지, 밥그릇 드는 법, 젓가락 드는 거, 걸레질 치는 거…. 시껍한 제자들이 한달을 못 있었어요. 근데 나는 거기 들어가서 ‘사람인 내가 성공하자고 하는 거니 잘 참자’. 그래서 청소하는 거, 밥 짓는 거, 반찬 맨드는 거, 된장 끓이는 거, (웃음) 어린애 기저귀 빨고, 오줌 뉘고, 똥 뉘고…. 엄동설한에도 아침에 5시에 일어나는 거야. 물이 아주 차요. 여기 이경순(김성춘과의 대담에는 녹음기사 이경순도 동석했다.- 필자)씨도 계시고 이영일씨가 수고를 많이 하시지만, 한국에서 감독이고 기술자고 배우고, 누구든 이런 거 시키면 아마 십리 밖으로 달아날 겁니다.

그래서 한 1년 배우 노릇을 했죠. 그랬다가 스승 보고 “선생님 도저히 내 체질이 안 되는데 기술로 전향을 하겠습니다”. 감독으로 전향하려고 했죠. 그런데 그때 조감독이라는 것은, 요즘 진행이라는 거 있잖아요? 그 정돕니다. 배우보다 못한 것이 조감독이에요. 그래서 조명을 하겠다 그랬죠. 그랬더니 “니가 희망이 그렇다면 우리 집에 있으면서 조명공부 해라”.

들어갔더니 밤에 식대를 주는데 아침에 7시에 나오면은 25전짜리 식권 하나, 또 점심 25전, 저녁에 7시 넘어가면 25전, 야간에 촬영 있으면 11시경에 야참이 25전. 이거를 합치면 한달 월급보다 많다는 그런 얘기야. 그 돈 가지고 실컷 먹고 구경도 하고 놀다가 들어오는 거지. 그리고 촬영소에서 패스 얻어 가지고 극장에 가면 전부 무료로 다 들어가는 거지.

이걸 쪼금 하니까 신흥키네마 나가세 촬영소 조명부로 들어가게 됐어요. 한 촬영소에 조명부가 90명씩, 조장이 9명 있어요. 그런데 내가 조명부장인데 대강 조명부라는 게 대체로 가짜가 좀 적지 않습니다. 끝나서 저녁 때 술을 한잔 하는데 웬 조선사람이 이규환이라는데 “오네가이시마쓰(부탁드립니다)” 그러거든.(“이규환이 조감독 때요?”- 대담중의 이영일) 어느날 낮에 세트 하고 점심시간이 됐는데, 이규환이 벤또 싸 가지고 혼자 앉아 먹어요. 누구든 혼자 앉았다 그러면 내가 불렀지. 그래서는 “당신이 한국사람인데 나도 한국사람이오”. 그러니까 놀랄 일이지. 그래서 가끔 만나서, 개울 풀밭에 앉아서 “장차 한국영화계 발전을 위해서 난 뭘 하는가” 그랬지. (웃음) 그런데 얼마 안 있다가 다카다미 요루가 동경으로 간 거야. 거기다가 영화관을 차렸어요. 그때 내가 거기 조명부장으로 갔죠. 프로덕션 이름이 부리야(不利屋)회사. 그러다가 얼마가 안 돼서 돌아왔죠. 34년 되겠구만요, 돌아왔을 적에.

기생들 데리고 일본 공연 추진

와 가지고, 종로에 ‘모로꼬’라는 다방이 있어요. 그 다방을 내 친구 전식일이라는 젊은 사람이 경영을 하는데 커피가 아주 최곱니다. 저는 커피 팬이기 때문에 맛을 알아요. 맛있어요. 그래서 거기 전부 모였는데 그냥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하다가 일본에 어떻게 한국의 문화를 한번 소개를 좀 해주면 좋겠다는 말이 났어요. 그때 1년에 한번씩 한국물산전시회라는 걸 했어요. 그래 의논을 했어요. “내가 돈을 빌릴 테니 한번 해보쇼”.

그때 조선권반, 한성권반이 합했어요(김성춘이 권번 기생들의 공연기획을 시도했다- 필자). 거기서 젤 잘한 놈을 사진을 백였지. ‘외류사진관’이라고 있어. 거기서 스틸을 찍었어요. 지금은 그걸 스틸이라 그러지. 그땐 사진이라 그랬지. 현대사진인데. 그런데 사진관의 박필호, 이 양반이 어떻게 고지식한지 고걸 이렇게 해달라면 반대로 하는 거야. 제대로 못 찍었지. 이놈을 가지고 동경을 갔습니다. 극장에 올리려고 갔어요. 동경의 일본극장 주인 되는 사람을 면회하고는 사진을 내놓고 얘길하니까 참 좋은 아이디어라 한단 말이지. “우리가 내선일체인데 조선의 예술을 우리 국민한테 보인다고 하는 그 정신은 아주 자랑스럽다.” 그런데 일류극장에다 한국의 영화를 틀면 수입은 좋지만 극장을 버린다 그런 얘기야. 뭔 소린고 하니 변소가 없어서 어른, 애 변소에 안 가고 거기서 똥 누고 오줌 누고, 그런단 얘기야. 그럼 일본손님은 돈 들여서 안 들어온다 그런 얘기지. “그러니 대판(오사카)에다 소개를 할 테니 대판으로 가시오.”

대판에 들어갔죠. 지배인 만나 하루에 대강 (관객) 수가 어떻게 따져보는데, 근데 수지가 안 맞어요, 도저히. 돌아와서 여러 가지 생각하니까 안 되겠어요. 그 뒤로 일본서 나왔죠. 조선에선 아주 성공하고 온 줄 알고 어떻게 됐느냐고 반가이 맞이하면서 묻는데 실패를 봤죠.

모로꼬 다방을 이달조라는 사람이 샀는데, 그 사람이 신사라 아주 예술계를 좋아해요. 놀고 있다가, 그 사람한테 “그럼 당신 한번 영화제작 안 해보실라우?” 했더니 “그 얼마나 있으면 되느냐?” 그러더라구. “한 만원 정도면 되겠소.” 그때 만원이 굉장히 큰돈이죠. “근데 우리나라에 지금 발성영화가 없으니 일본하고 합작을 합시다.” 그래서 (이달조가) 만원 내기로 해서 동경을 갔어요.정리 안선주/ 중앙대학교 영화학과이영일 프로젝트 연구원 babtong80@hanmail.net 이 기록은 고 이영일 선생이 남긴 귀중한 자료인 원로영화인 녹취테이프를 소장 영화학도들이 풀어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