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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군 투덜양] 차라리 꽈배기 3부작이라 부르시지?

투덜양, <바벨>까지 이어지는 ‘신경쇠약 직전의 미국인’의 상투성에 진저리치다

<바벨>

<크래쉬>

<바벨>을 보면서 지난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크래쉬>가 떠올랐다. 얇고 하이톤으로 ‘위 아 더 월드’를 외쳐 부르는 <크래쉬>에 비하면서 <바벨>은 좀더 중후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이것이 영화 자체의 품위 때문인지 아니면 3대륙을 넘나드는 영화의 스케일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암튼 두 영화는 9·11 사태 이후 서구 미디어가 가장 적극으로 차용해온 징후인 신경쇠약 직전의 미국인을 그린다. <크래쉬>의 백인 중산층 여성이 히스패닉계 열쇠공을 계속해서 의심하는 것처럼 <바벨>의 미국인 부부는 굳이 모로코까지 먼 길을 여행와서 모로코인들이 콜라에 함께 주는 얼음도 의심하며 먹지 못한다.

두 영화의 또 다른 공통점은 등장인물들이 자기도 모르게 어떤 인과관계의 실타래로 엮여 있다는 것인데 <크래쉬>에서 그 관계들이 태피스트리처럼 병렬적이면서도 다소 복잡하게 가계도를 그린다면, <바벨>에서는 자주 인용되듯이 ‘나비효과’처럼 하나의 사건이 여러 사람을 들쑤셔놓는다.

이 두 가지 공통점에도 공통점이 있어 보인다. 조금 단순화한다면 노이로제에 걸린 서구인이라는 주제와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섬을 잇는 우연의 연결고리라는 이야기 구조는 가깝게는 포스트 9·11, 멀게는 20세기 말부터 살짝이라도 있어 보이고 싶은 영화들의 매뉴얼로 이용돼왔다. 물론 이런 스타일과 이야기를 가진 영화 가운데 찾아보면 신선한 충격을 줬던 ‘원조’도 있겠지만 언젠가부터 이 두 가지는 클리셰가 돼버렸다는 이야기다. 미국인들의 자기반성처럼 보였던 비판적 시선과 냉소도 하도 반복적으로 주입식 교육을 받다보니 이제는 도리어 ‘우리 이렇게 불쌍하니까 히스테리 좀 부려도 이해해줘’라는 투정으로 들리고, 별것도 아닌 퍼즐놀이식 플롯은 감독이 잔머리를 굴리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특히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은 지금까지 전세계 개봉을 한 세개의 작품이 모두 유사한 플롯을 가지고 있으니 이런 의심은 더 많이 든다. 사람들은 이렇게 비스무리한 모양새의 <아모레스 페로스> <21그램>, 그리고 <바벨>을 ‘진실 3부작’이라고 부른다는데 차라리 ‘꽈배기 3부작’으로 부르는 게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더불어 <크래쉬>보다는 덜 이기적으로 보이지만 <바벨>이 더 이상해 보이는 부분은 바로 일본의 에피소드다. 야쿠쇼 고지가 자신을 여행 가이드했던 사람에게 선물했던 총이 모든 사건의 발단이 됐다는 억지에 가까운 연결고리로 이어진 이 에피소드에는 지극히 피상적인 현대인의 고독과 또 초현대적인 대도시 도쿄에 대한 외부인들의 선망이 가득 실려 있다. <보랏: 카자흐스탄 킹카의 미국 문화 빨아들이기>를 보고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카자흐스탄 사람들이 있다면 <바벨>을 보며 콧바람을 피식피식 내뿜는 일본 사람들도 꽤나 있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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