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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을 만드는 침묵의 언어, 미국 무성영화 특별전

3월13일부터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세계 영화사를 다룬 어느 책을 참조하든지, 영화의 역사에서 1915년은 하나의 전환점을 이룬다. 미국의 영화사가인 톰 거닝의 표현을 빌린다면, 세계 영화사에서 1915년은 시각적 볼거리를 통한 매혹의 영화(cinema of attraction)에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서술하는 영화(cinema of narration)로 나아가는 전환점이었고, 그 중심에 D. W.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The Birth of a Nation, 1915)이 위치한다. 그리피스에게서 비롯된 무성영화의 침묵의 언어는 유아기 상태의 영화를 소년, 소녀로 성장시키며, 매혹적인 몸짓과 눈길로 ‘이야기하는’ 장편영화의 시대를 개척해나간 궁극적인 힘이었다. 오는 3월13일(화)부터 25일(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미국 무성영화의 위대한 배우들 특별전’은 영화가 유아기에서 벗어나 유성영화와 색채영화의 등장 이전까지 자신의 미학을 발전시켰던 1910년대 후반부터 20년대 중·후반까지 총 12편의 무성영화들을 다채롭게 선보인다.

실험적 내러티브, 무성멜로 관습 창조한 그리피스

이번 특별전에서 눈길을 끄는 작품은 무성영화의 상징적 존재인 그리피스의 <인톨러런스>(Intolerance, 1916), <동부 저 멀리>(Way Down East, 1920), <풍운의 고아>(Orphans of the Storm, 1921)이다. <인톨러런스>는 페르시아인의 바빌로니아 제국 정복에서 시작하여 그리스도 이야기와 카트린의 위그노교도 박해, 그리고 자본주의에 항거하는 노동자들의 투쟁 등으로 시공간을 반복적으로 이동하는 실험적인 내러티브를 선보인다. 하지만 과거에서 현재까지, 동양에서 서양까지 시공간을 교차하며 구성한 <인톨러런스>는 아직은 ‘시각적 볼거리로서의 영화’에 익숙해 있던 관객에게는 너무도 혁신적인 작품이었고, 이후 그리피스는 저예산 멜로드라마를 연출하는 데 만족하며 실패의 대가를 단단히 치러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멜로드라마를 폄하해서는 곤란하다. 그 대표작인 <흩어진 꽃잎>(Broken Blossoms or The Yellow Man and the Girl, 1919, 미상영작)을 비롯하여 <동부 저 멀리>와 <풍운의 고아> 등은 무성멜로드라마의 관습을 창조한 작품들이라 불러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그리피스의 멜로드라마는 곧 릴리언 기시의 영화이기도 하다. <인톨러런스>에서 전 에피소드를 아우르는 상징적 존재인 요람을 흔드는 여인으로 등장했던 것처럼, 릴리언 기시는 그리피스의 1920년대 멜로드라마의 상징적 존재이다. 무한한 감성적 호소력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릴리언 기시의 아름다움은 멜로드라마의 비극적 정서 그 자체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고 자신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멀리 떠나야만 하는 여인의 이야기인 <동부 저 멀리>와 프랑스 대혁명 시기 자신의 눈먼 여동생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절규하는 한 여인의 이야기인 <풍운의 고아>는 이 두 사람의 호흡 속에 탄생했다. <풍운의 고아>가 그리피스의 두 가지 경향, 즉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웅장한 군중신을 곁들였던 전성기 시절의 특징과 1920년대 릴리언 기시를 앞세운 멜로드라마적 감수성 모두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라면, <동부 저 멀리>는 슬픔과 고통 속에서 오히려 빛을 발하는 릴리언 기시의 모습이 영화 후반부 얼어붙은 강의 빙판이 갈라지는 장관 속에 각인되어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러한 그리피스의 멜로드라마들은 흥행에서만큼은 그에게 재기의 선물을 안겨주지 못했다. <인톨러런스>에서 시작된 그리피스의 흥행 재난은 1920년대까지 고스란히 이어졌고, 릴리언 기시마저 그리피스의 품을 떠나 MGM으로 둥지를 옮긴다. 물론 릴리언 기시 역시 유성영화로 빠르게 전환해가는 영화산업에 적응하지 못했고, 다시 연극 무대로 돌아가야만 했다.

스톤 페이스와 스턴트 코미디의 버스터 키튼

<손님 접대법>

그리피스와 릴리언 기시가 할리우드에서 점차 잊혀지는 과정은 무성영화의 종식과 그 궤적을 함께한다는 면에서 그 상징적 가치를 확인할 수 있지만, 이에 빼놓을 수 없는 무성영화 시대의 대가가 바로 버스터 키튼이다. 키튼의 전매특허인 무표정한 스톤 페이스(stone face)와 함께 인간의 몸이 지닌 유한성에 ‘무한 도전’하는 그의 작품들은 대체로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의 성취 과정을 서사 축으로 삼아 전개되곤 했다. 이번 특별전에서 상영되는 <세 가지 시대>(Three Ages, 1923), <항해자>(The Navigator, 1923), <손님 접대법>(Our Hospitality, 1924), <일곱 번째 기회>(Seven Chances, 1925)에서도 이러한 특징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특히 이들 작품들은 그의 최고작인 <장군>(The General, 1927, 미상영작)에 다가가면서 그의 영화적 특징이 점차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석기시대, 로마시대, 그리고 동시대로 이어지는 사랑의 풍속도를 가벼운 터치로 그려내는 <세 가지 시대>와 대형 여객선에 덩그러니 남겨진 두 남녀의 해프닝을 담아내는 <항해자>가 키튼의 스턴트 연기보다는 시추에이션코미디 형식 속에 아기자기한 웃음을 일으키는 작품들이라면, <손님 접대법>과 <일곱 번째 기회>는 <장군>에 못지않은 스턴트코미디의 진가를 느낄 수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패러디처럼 보이는 <우리의 환대>가 거대한 폭포를 앞에 둔 채로 펼쳐지는 스턴트코미디가 압권이라면, <일곱 번째 기회>는 육해공 모두를 넘나드는 키튼의 스턴트를 두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그의 또 다른 걸작이라 해도 부족하지 않다. 특히 파산 직전에 몰린 한 청년에게 27살 생일의 저녁 7시까지 결혼을 해야만 한다는 조건과 함께 할아버지로부터 7만달러의 유산이 전해지면서 발생하는 일련의 사건을 유쾌한 분위기 속에 담아내는 <일곱 번째 기회>는 키튼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몇 시간 남지 않은 7시까지 신부를 구하는 과정의 해프닝 속에 크레인에 매달리는 스턴트나 바위산에서 그가 보여주는 일련의 연기는 버스터 키튼 영화의 압축판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무성영화와 쇠락을 함께한 코미디 배우 해리 랭던

무성영화의 종말과 함께 할리우드에서 잊혀진 비운의 인물인 그리피스와 릴리언 기시, 버스터 키튼과 달리 이탈리아 태생으로 1930년대 이후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전성기를 이끈 감독 중 하나로 평가받는 프랭크 카프라는 유성영화에서 자신의 진가를 더 빛낸 감독이다. 프랭크 카프라의 무성영화인 <강자>(The Strong Man, 1926), <긴 바지>(Long Pants, 1927)는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의 힘으로 전개되는 스크루볼코미디를 대표하는 그의 ‘말없는 영화’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작품이지만, 이 작품들을 더 주목하게 하는 것은 해리 랭던이라는 배우 때문이다. 해리 랭던은 초기 코미디 무성영화의 대가이자 키스톤 영화사의 창립자인 맥 세네트(찰리 채플린을 영화계로 픽업한 이도 바로 세네트다)에게 발굴되어 무성코미디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배우로까지 성장했지만, 그의 코미디 연기 역시 유성영화의 벽을 넘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1930년대 이후 자신의 코미디 인생과 대조되는 비극적인 하락을 경험해야만 했다. 이미 상영회나 DVD를 통해 만날 수 있었던 릴리언 기시나 버스터 키튼과 달리 해리 랭던의 무성코미디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는 점에서 <강자>와 <긴바지>는 놓치기 아쉬운 작품이다.

또한 갱스터와 필름누아르, 그리고 서부극까지 모든 장르영화를 넘나들었던 라울 월시의 <바그다드의 도둑>(The Thief of Bafdad, 1924)은 무성영화 시대의 몽환적이면서도 마술적인 장면들과 라울 월시 특유의 힘있는 연출이 결합된 작품이다. 물론 이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찰리 채플린과 함께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영화사’를 창립했던 이로서 무성영화 시기 영웅적인 남성상을 대변했던 배우 더글러스 페어뱅크스다. 그는 로빈 후드나 조로, 달타냥 등의 전설이나 역사 속의 영웅적 인물을 통해 자신의 페르소나를 만들었는데, <바그다의 도둑>에서도 이러한 그의 면모가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이들 작품 외에도 더글러스 페어뱅크스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한 모험을 보여주는 알버트 파커의 <검은 도적>(The Black Pirate, 1926), 해리 랭던의 첫 장편 데뷔작인 해리 에드워즈의 <쿵, 쿵, 쿵>(Tramp, Tramp, Tramp, 1926) 등이 함께 상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