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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한 방랑을 즐기다, 빔 벤더스 특별전

3월15일부터 28일까지 스폰지하우스 시네코아에서

빔 벤더스의 최근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그를 좋아했던 관객에겐 좀 가슴 아픈 일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벤더스는 과거에 비해 의미있는 작품들을 내놓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작으로 알려진 <베를린 천사의 시>(1987)가 발표될 때, 이미 그의 쇠락을 예고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세속적인 낭만의 과잉 표출이 약점으로 지적됐던 것이다. 벤더스가 세계 영화계의 주목을 받은 것은 70년대 ‘뉴저먼 시네마’의 3인방 중 한명으로서였다. 이중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베르너 헤어초크가 상대적으로 유럽적인 영화 양식에 치중했다면, 벤더스는 미국적인 것에 가까웠다. 미군라디오방송과 미국영화를 보고 자랐다는 이력이 그의 영화적 특징을 설명할 때면 빠지지 않고 거론됐다. 블루스 음악과 장르영화의 변주에 대한 애착은 어릴 적 경험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돈 컴 노킹>(2005)과 <파리 텍사스>(1984)는 웨스턴 형식에 크게 빚진 작품들이다. 그렇다고 그가 유럽적인 전통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영화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표면을 닮았다는 사실은 너무나 유명하다. 사막에 대한 집착 하나로 우선 두 감독의 공간적 공통점을 지적하고 넘어가자. 영화적 배경 이외에 그의 영화에서 보이는 특징 중 하나는 독일 낭만주의의 계승이다. 외로움과 방랑에 대한 사랑, 이는 독일 낭만주의가 남겨놓은 예술적 취미로 벤더스의 인물들은 슈베르트의 방랑자들처럼 혹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인물들처럼 외로운 방랑을 즐기는 명상가들이다.

벤더스가 자신의 이런 예술적 취향을 드러냄으로써 많은 관객과 소통에 성공한 첫 영화가 <도시의 앨리스>(1974)다. 그의 나이 29살 때다. 방랑하는 사람들, 풍경화와 같은 빼어난 장면으로 인물들의 심리를 대신 표현해내는 수법, 정적인 롱테이크 장면, 그리고 미국 문화에 대한 애증이 멜랑콜리의 무드 속에 녹아 있다. 연이어 그는 ‘로드무비 3부작’이라고 불리는 작품들을 내놓는데, <빗나간 행동>(1975), <시간의 흐름 속으로>(1976)가 그것들이다. 영어 제목이 <길의 왕>인 <시간의 흐름 속으로>는 벤더스가 로드무비 형식을 더 극단으로 끌고 간 수작이다. 영사기 수리공과 소아과 의사는 정처없이 방랑의 길에 오른다. 1969년 데니스 호퍼가 감독한 <이지 라이더>와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벤더스의 영화에는 플롯도 없고, 어디까지 갈 것인지 목적도 없다는 점에서 더욱더 관습에서 벗어나 있다. 말 그대로 길 위의 여행과 명상만이 펼쳐진다.

<미국인 친구>

로드무비 3부작에 이어 그는 장르 변주까지 선보인다. <미국인 친구>(1977)는 ‘리플리 시리즈’로 유명한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원작을 각색한 누아르다. 벤더스가 흠모해 마지않았던 니콜라스 레이와 새뮤얼 풀러 감독이 악당으로 잠시 출연해 신예감독의 기량을 일찌감치 축복하기도 했다. 장르 변주와 감독 특유의 멜랑콜리가 서로 상승작용을 보인 작품이 벤더스의 최고작으로 남아 있는 <파리 텍사스>이다. 태양처럼 외로운 사막을 홀로 걷고 있는 트래비스(해리 딘 스탠튼)의 황량한 첫 모습으로 영원히 기억되는 작품이다. 벤더스의 오랜 동료인 촬영감독 로비 뮐러, 음악가 라이 쿠더와 함께 만들어낸 최고작으로, 음악과 화면이 빚어내는 쓸쓸한 무드는 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세상과 자주 비교되기도 한다. 낭만주의자들의 멜랑콜리는 현재와의 갈등에서 비롯된 슬픈 정서다. 이 감정은 본질적으로 미래에 대한 도전으로 향한다. 미지의 그 무엇을 향한 마음의 움직임인 것이다. 그래서 멜랑콜리는 예술가의 특성으로 꼽힌다. 창의력이 멜랑콜리와 관계 깊은 점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아쉽게도 최근의 벤더스 작품에선 예술가적 멜랑콜리가 잘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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