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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하와이의 모기와 흡혈귀

김영하의 소설 <검은 꽃>은 20세기 초 멕시코로 이민가는 한인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마치 사회의 아르케노아처럼 인천 항구에서 남미로 향하는 배를 타는 이들은 도둑놈부터 양반까지 조선사회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이뤄져 있다.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일단 ‘성지’에 가면 풍족하게 살고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과장광고를 믿고 몸을 커다란 기선에 싣는다. 그들은 긴 여행의 과정 속에서 점점 자신들이 감행하는 모험의 규모를 짐작하게 된다. 자신들의 지위를 누리지 못하는 양반들은 좌절하고, 농민, 노동자와 나머지 사람들은 그나마 처음부터 적응을 위한 노력을 하지만, 그들도 새로운 환경에 완전히 적응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끈기와 노력 끝에 한인들은 그럭저럭 살림을 꾸리고, 그 사이에 식민화가 되어버린 고국을 위해 독립운동까지 벌인다. 이 이야기는 소설이지만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처음 이주노동자로 하와이, 멕시코 등에 간 한인들에 대한 실화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경험은 나중에 한국에서 벌어질 근대화 혹은 오늘날 우리 모습의 예고이기도 하다.

‘근대적 노동’은 자본과 두려움의 이야기이다. 새로운 기술과 사고방식으로 인해 자본의 논리는 사회를 다스린다. ‘살아 있는 일’이 자본의 논리에 복종되어 ‘죽은 노동’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경제적인 실패 즉 먹고 살 수 없음이 두려워 저절로 무한경쟁에 참여하게 되고 자기 자신을 소외시킴으로써 주체의 분리에 이르게 된다. 즉, 근대화의 과정에서- 구체적인 그리고 구조적인- 엄청난 폭력으로 외상(Trauma)을 입어 두려움을 갖게 되는 우리는 자아와의 분리를 강요받고, 이러한 폭력의 ‘주체’와의 동일시 즉 그 논리를 내재화한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두려움은 사회 위에 걸려 있는 다모클레스의 칼처럼 무거운 그늘을 지워 다시금 우리를 자본에 묶이게끔 한다.

한인들의 하와이 이민사를 다룬 자료를 보면 하와이가 ‘하늘 아래의 낙원’이라고 속은 이들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사탕수수농장에 배치되어 낯설고 거친 노동과 감독들의 매운 채찍에 시달리고 정신없이 일하며 노예생활에 가까운 나날을 보냈다. 대부분 농장주들은 19세기 중반 선교사로 하와이에 왔다가 당시 왕가와 좋은 관계를 맺은 뒤 사업가로 탈바꿈한 백인 미국인들이었다. 그들은 기원전 10세기경 이 섬나라에 정착하고 있던 원주민들의 주식인 타로식물의 뿌리를 뽑고 그곳에 ‘돈 되는’ 사탕수수를 심었고, 서양인들이 옮겨놓은 성병으로 거의 소멸된 원주민들이 ‘너무 느긋하고 게을렀기’ 때문에 시키면 열심히 일하는 중국인, 일본인, 포르투갈인, 푸에르토리코인 그리고 한인까지 ‘수입’해서 농장에 투입했다. 한인들을 끌어들인 주된 이유는 그들이 부지런해서라기보다는 농장주들에게 노동환경 개선과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는 중국인과 일본인들을 봉쇄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인들을 비롯해 ‘신세계’에 온 모든 이민자들이 공통으로 부딪치는 것은 근대적 노동환경과 방식·관계 등일 것이다. 그중에 신교도의 노동윤리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농장들을 사찰하러 온 윤치호 외교차관은 이민 노동자들을 앞에 두고 국익과 ‘국민’으로서의 소명을 강조하면서,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는 성경의 노동윤리를 주입시키는 데 한몫했다. 한인들은 조선에서처럼 해가 질 때까지 주인의 마음대로가 아니라, 계약에 따라 시간에 맞춰서 일하면 정해져 있는 보상을 받고, 일요일에는 쉬면서 교회에 가고, 조선과 같은 엄격한 위계질서가 없는,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될 수 있는 ‘무한한 기회의 나라’에 온 셈이었다. 결국 이민자들은 새로운 기술과 이데올로기를 배우고 그것이 또 점차 몸에 배어들면서 개인과 국민으로서의 주권을 쟁취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 대가로 주체로서의 영성(靈性)과 자율성을 버려야만 했다.

복종해야 자유로울 수 있다는 모순은 인류사의 오랜 주제인데, 근대에 들어서 이 발전이 가속화되어서 문제가 ‘모기’에서 ‘마귀’로 악화된다. 모기한테 물리면 간단한 간지러움부터 최악의 경우 말라리아에 걸려 고통 끝에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본은 이미 죽은 노동으로서, 이 노동은 오직 흡혈귀처럼 살아 있는 노동을 흡수함으로써만 활기를 띠며 그리고 그것을 흡수하면 할수록 점점 더 활기를 띠어간다’고 한다. 흡혈귀한테 일단 물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않는가. 문제는 밤이 오늘날까지 계속 깊어지고 있다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