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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거탑> 에세이 2. 한순간도 당신을 미워하지 못했어
정이현(소설가) 2007-03-20

<하얀거탑>의 장준혁을 향한 사모곡

당신은 철저히 개인주의적인 인간이다. 오직 당신 내면의 욕망에 의해서만 움직이고, 욕망을 위해서만 산다. 결혼조차 냉혹한 비즈니스마인드로 했을 것이다. 능구렁이처럼 사위의 성공을 전력 지원하는 장인과 아름답고 맹한 아내로 구성된 당신의 가족 안에 아이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왜 벌판에 나가 피 흘리며 싸우는 줄 알아? 다 자식새끼 먹여살리기 위해서야!’라고 큰소리치는 것은 당신과 어울리지 않으니까. 당신은 핑계 따위와는 거리가 먼 인간이다. 윤리적 당위성 뒤에 실존을 숨기는 일은 더더군다나. 장준혁의 정부(政府)는 다만 장준혁 개인이다.

자, 처음부터 한번 찬찬히 따져보기로 하자. 당신은 실력이 출중한 외과의다. 조직 내부에서 가장 능력 있는 자가 리더가 된다는 자본주의 사회의 이상적 규칙을 따른다면, 명인대학병원의 새로운 외과과장 자리는 누가 뭐래도 원래 당신 것이었다. 당신의 스승 이주완 과장이 딴마음을 먹기 전까지는.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당신이 선택한 방법은 다른 스승들(민충식-유필상-우용길)에게 기대는 것이다. 노회한 이 세속의 선생들에게 정치판의 ABC를 배워가는 동안 당신의 마음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는 건 눈치챘다. 늦은 밤, 은밀한 술집. 제 금딱지 시계를 풀어 채워주며 ‘형’이라 불러보라고 주정하는 유필상을 바라보던 당신의 눈동자를 기억한다. 그건 분명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얼마만큼 온 거지. 거리를 가늠할 수 없어 잠깐 아득해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은 곧 그 시계를 유필상의 주머니에 슬쩍 찔러넣어 되돌려준다. 그러고나서 낮고 비감하게 뇌까리는 소리를 나는 듣고 말았다. 형. 그렇게 발음한 당신은 이미 터닝 포인트를 지나왔다.

당신은 괜찮다고 믿었을 것이다. 왜? ‘나’는 대단한 사람이므로. ‘나’에게는 더 중요한 목표가 있으므로. 더 큰 것을 얻기 위해 이 정도는 해도 한다고 보았을 것이다. 개인적 욕망을 위해서라면 제도를 이용하고 제도를 가뿐히 타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누군가는 오만이라고 부르는, 스스로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그것을 가능케 했다. 천신만고 끝에 결선투표에서 이긴 당신은 드디어 과장 자리에 오른다. 스테이지 클리어. 이제 위태로운 게임은 끝난 것인가.

희열을 채 만끽하기도 전에 우용길과 유필상은 납품을 청탁하는 의약품 리스트를 당신에게 쥐어준다. 손에 피와 배설물과 콜타르를 묻혀가며 당신의 승리를 위해 싸웠다고 주장하는 그들로서는 타당한 요구일 것이다. 당신이 가진 탄복할 만한 실력이나 뜨거운 열정은 권력질서의 현실 앞에서 실상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도망갈 데는 없다. 제도를 벗어날 방법은 더 큰 제도에 매몰되는 것뿐, 당신의 도주로는 원천봉쇄돼 있다. 당신이 처음부터 거미줄로 뒤얽힌 시스템 한가운데 갇혀 있었다는 걸, 당신만 몰랐다.

과장이 되자마자 세계학회를 준비하고, 세계학회장 부인의 수술을 간신히 성공시키자마자 의료소송에 휘말리고, 긴 재판이 끝나자마자 암 선고를 받은 당신. 힘겹게 미션을 완수하고 나면 눈앞엔 언제나 넥스트 스테이지가 활짝 펼쳐져 있다. 숨 고를 틈도 없이 당신은 또 쫓기듯 내달린다. 당신은 어디로 가는가. 당신이 가닿고자 하는 욕망의 끝은 어디인가. 아니, 그런 것이 애초에 있기나 했던가. 고단한 당신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자꾸만 쓸쓸해진다.

강철처럼 단단해 보이지만 실은 부서질 것처럼 연약한 사람. 이토록 불완전한 개인. 이토록 연민스러운 당신. 악의로 충만한 적 없었으나 운명이 늘 앞질러 당신의 선의를 배반했음을 알고 있다. 안녕, 장준혁. 적어도 나는, 한순간도 당신을 미워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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