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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없는 소년들을 위하여, <벽>

EBS 3월31일(토) 밤 11시

바흐만 고바디의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을 통해 이미 우리는 쿠르드인들의 고단한 삶을 목격한 바 있다. 술에 취한 노새를 끌고 국경을 넘나드는 소년의 삶에서 희망을 말한다는 것은 오히려 사치였다.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과연 생존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 뿌리를 상실당한 채 부유하는 쿠르드인의 삶은 일마즈 귀니의 <>에서도 잘 드러난다. 터키 태생이자 쿠르드인 부모를 둔 감독은 터키 내의 수용소로 시선을 돌린다. 그 안에는 성별, 연령을 불문하고 수감된 쿠르드인들이 있다. 특히 감독은 이들 중에서도 격한 노동과 간수들의 폭력에 시달리는 소년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그는 이들을 둘러싼 물리적인 벽뿐만 아니라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편견과 억압의 벽을 형상화하며, 궁극에는 그 벽을 죽음의 벽으로 그린다.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에서처럼 이곳에도 희망은 없다. <>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고달파지는 소년들의 현실을 냉정하게 밀고 간다.

영화 속 수용소에서의 이야기들은 상당 부분 감독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구성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는 1971년 터키의 군사혁명이 일어난 뒤 반정부활동의 이력으로 투옥되어 약 10년간을 감옥에서 보냈다. 감옥 안에서도 그는 끊임없이 시나리오를 쓰고 감옥 밖의 동료에게 연출을 맡기며 영화를 만들어냈다. 그 결과물 중 하나가 1983년에 칸영화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이다. <> 역시 악명 높은 터키 감옥에서 시작되는 영화로, 일주일간 휴가를 받은 모범수들의 행로를 따른다. <>에 내재된 일마즈 귀니의 반정부적 저항은 일년 뒤 제작된 <>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그는 이 영화에서 감옥 밖이 아닌 감옥 내부의 상황을 재현하는 데 공을 들인다. 영화의 무대는 감옥이라는 공간에만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수감자들의 일상은 유사한 경로를 오가며 반복적으로 형상화된다. 그러한 반복의 틈새에 소년들의 자유에의 열망, 분노가 누적된다. 결국 누군가는 탈출을 시도하다 사살되고, 누군가는 폭동을 일으키고, 그리고 누군가는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지만, 영화는 이들 모두에게 한줌의 빛도 허락하지 않는다.

일마즈 귀니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비판적인 시선으로 재구성해왔다. <>은 그의 생애 마지막 작품이다. 자신만의 영화언어로 사회에 대한 발언을 멈추지 않은 감독들, 그는 그들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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