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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 프라이팬 소년
권리(소설가) 2007-04-06

던킨 도너츠에 된장녀 스타일로 앉아 있는데, 누군가가 내 앞에 프라이팬을 내밀었다. 우아한 클래식 음악과 소곤거리는 사람들의 대화, 햇살이 비치는 창 등 조용한 카페의 미장센에 불협화음을 낸 그 소년. 사시였다. 눈동자가 제멋대로 춤추고 있어 나를 보는지 내 옆사람을 보는지 알 수 없게 했다. 난 메모를 끼적거리고 있었기에 갑자기 내 앞에 놓인 프라이팬 앞에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프라이팬은 기묘할 정도로 컸다. 소년은 약간 뚱뚱했고 시니컬한 말투의 소유자였다. “동전이나 좀 주세요.” 그리고 소년은 프라이팬에 있던 동전 하나를 일부러 떨어뜨려 쨍그랑 소리를 냈다. 사람들이 이쪽을 쳐다보았다. 난 당황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고 소년은 금세 다른 테이블로 옮겨갔다. 사람들의 표정을 관찰했다. 누구나 당황하는 표정이었고 소년은 두 테이블에 한명 정도의 확률로 돈을 받을 수 있었다. 소년은 거대한 프라이팬을 옆구리에 끼고 계단을 걸어내려가 유유히 사라졌다.

광인.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지 알고 싶으면 광인을 만나야 한다. 광인은 질서의 반대편에 서 있고 사회의 위기 수준을 나타내주는 바로미터이기 때문이다. 물론 광인에도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정신지체나 정신분열과 별 구분이 가지 않는 병리학적 광인이 있고, 사회의 질서를 깨뜨리는 사회적 광인이 있다. 우리가 자주 부딪히는 광인들은 주로 후자일 것이다. 아무래도 전자를 만나려면 정신병원까지 찾아가야하니까.

신촌에 가면 행인을 때리는 노년 여성이 있다(‘할머니’라는 의미는 또 다른 의미를 파생할 수 있으므로 좀더 객관적인 ‘노년 여성’으로 명시하겠다). 그 여성은 헝클어지고 시든 머리카락을 대충 묶고 금방이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사람들에게 구걸을 한다. 그녀의 구타 행위는 일종의 언어 행위이다. 나는 그녀에게 맞을 때마다 그녀가 내게 얼마나 말을 걸고 싶어하는지 알 것만 같다. 말이 너무 많은 시대에 비언어적인 행위로 말을 전달한다는 것 자체가 신선하게 느껴진다.

신촌이 아니더라도 언제 어디서나 저 정도 수준의 ‘광인’을 만날 수 있다. 우리 동네에 밤낮 사다리를 들고 다니며 혼자 중얼거리는 중년 여성이 있다. 그녀에게는 목적지가 없다. 그저 길 잃은 망아지처럼 같은 동네를 종일 뱅글뱅글 돌고 있다. 까만 볼펜을 꺼내 흰 종이 위에 강박적으로 원을 그려보자. 종이가 뚫리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그렇게 걸어다니다가 딴 세상으로 가버릴지도 모른다. 그녀는 담벼락에 자잘한 글씨로 긴 낙서를 쓰곤 한다. 낙서의 내용은 자신의 집주소, 이름, 그리고 알 수 없는 문장들이다. 주소를 쓴다는 것은 왠지 정체성 혼란과 연관이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녀의 글 혹은 말에는 어떤 질서도 없으므로 역시나 비언어적인 행위처럼 보일 뿐이다.

저들을 보고 있으면 정신이 어떻게 낙타가 되고, 낙타가 어떻게 사자가 되고, 마침내 사자가 어떻게 아이가 되는가를 역설하겠다는 차라투스트라가 생각난다. 그의 말은 온통 이해불가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문장들 속에서 가끔 빛나는 아포리즘을 발견할 수 있다. 정신과 낙타, 낙타와 사자, 사자와 아이 사이에는 엄청난 도약이 있다. 그들 사이의 유기적 관계는 각 단어가 지닌 상징에 대한 상투성을 깨지 않고는 알아내기 힘들다. 마찬가지로 광인의 행동, 반응, 질문, 커뮤니케이션에는 늘 도약이 있게 마련이고 그 도약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스스로 백지 상태가 되어야 한다.

나는 몇몇 광인들과 직접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솔직히 말하면 그들과의 합리적인 대화란 거의 불가능하다. 각자 혼잣말을 하고 있으므로. 하지만 대화라는 것도 기막힌 우연의 산물이다. 서로의 심리를 탐색하고 끼워맞추려 애쓰는 퍼즐과도 같다. 광인과의 대화에는 그런 억지스러움이 없다. 그러므로 광인들에게 더 자주, 더 자세하게 말을 걸어야 한다. 대화가 필요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