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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이슈] 어느 사회파 감독의 변신
강병진 2007-04-17

박광수 감독의 8년만의 신작 <눈부신 날에>가 전작들과 다른 까닭?

투항인가? 변신인가? 아니면 오해인가? <눈부신 날에>로 돌아온 박광수 감독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면 80년대식 어법이라는 비난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박광수 감독의 이번 영화가 우리가 알던 박광수 영화와 매우 다른 낯선 영화임은 분명하다.

<눈부신 날에>는 지난 4월10일, 언론에 공개됐다. 박광수 감독이 8년 만에 만든 7번째 장편영화로 척박한 인생을 살고 있던 한 남자가 불치병에 걸린 딸을 만나 새로운 인생을 찾게 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시나리오 개발 당시부터 그의 이전 작품과는 매우 다른 소재의 이야기였다는 점에서 화제가 되었던 <눈부신 날에>는 공개 뒤에 더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등 비판적인 시선으로 한국사회를 조망하던 박광수 감독의 작품이라고 보기에는 영화의 스타일과 정서가 매우 낯설기 때문이다. 더이상 사회파 감독이라는 꼬리표를 달지 말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눈부신 날에>는 박광수 감독의 지난 8년을 궁금하게 만든다. 과연 그 긴 시간 동안 그에게는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부터 변화 의지 느껴

기억할 것은 지난 8년간 박광수 감독이 자기 의지로 연출을 안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돌이켜보면 2003년 GP에 근무하는 병사들간의 갈등과 동성애, 판타지를 다룬 작품 <방아쇠>는 준비과정에서 중단됐다. 박광수 감독으로서는 이전과는 다른 영화를 시도하기 위해 여러 단편실험을 거쳐 준비한 프로젝트지만 투자자들이 1999년 개봉한 <이재수의 난>의 흥행실패를 떠올렸던 탓이다. 현기영의 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를 원작으로 한 <이재수의 난>은 35억원이란 당시만 해도 블록버스터급 제작비로 만들어졌지만, 흥행에서 참패해 제작사인 기획시대에 큰 빚을 안겨주었다. <눈부신 날에> 역시 그의 영화적인 변화가 아니라 산업적인 영향에 의한 도피로 보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박광수 감독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내 영화를 놓고 사람들은 사회적 리얼리티, 비판적 리얼리즘 등을 운운한다. 하지만 난 남들이 건드리지 않는 것을 건드렸을 뿐이다. 내 영화에 대해 그렇게 평가하는 것은 영화를 자세히 보지 않고 쉽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박광수 감독은 이미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내놓았을 때부터 변화의 의지를 느꼈다고 말했다. <아름다운 청년…>은 박광수 감독의 작품 중 가장 많은 관객과 만난 영화였다. 하지만 지식인이란 화두를 던지고 싶었던 그의 의도와는 달리 영화는 전태일이란 상징적인 인물에 대해서만 평가됐다. 말하자면, 감독 자신이 변하기 전에 세상이 먼저 변했기 때문에 자신도 변했다는 것이다. 변화의 조짐은 <이재수의 난>의 흥행실패로 더욱 구체적인 윤곽을 드러냈다. “<이재수의 난>은 영화를 시작하던 초기부터 만들고 싶었던 작품이었다. 그때가 아니면 만들 수 없을 것 같더라. 하지만 <이재수의 난>을 끝낸 뒤 이런 영화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박광수 감독은 영상원 교수로 재직하면서 디지털 단편영화를 통해 다양한 영화형식을 실험하며 이전의 방식들을 버리는 작업을 했다. “아예 멀리 가버려야 돌아오더라도 중간지점 정도에 머무르게 마련이다. 하지만 어설프게 시도할 경우에는 다시 제자리에 돌아올 것 같더라.”

매니지먼트 기업 싸이더스HQ에서 연출 의뢰

<방아쇠>가 불발된 뒤, 박광수 감독의 신작 소식이 들려온 건 2004년 가을이었다. 눈물겨운 부성애를 다룬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는 이야기도 낯설었지만, 또 한 가지 놀라운 점은 박광수 감독에게 연출을 맡긴 이가 싸이더스HQ의 정훈탁 대표였다는 사실이었다. 거대 매니지먼트기업의 대표와 사회로부터 소외된 구석에 눈길을 주던 영화감독의 만남은 궁금증을 자아냈다. 당시는 <해피에로 크리스마스> <마들렌>등을 공동제작했지만 흥행이나 비평 양면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싸이더스HQ에도 도전이 필요한 시기였다. 하지만 당시 만남을 주선했던 김성수 감독은 두 사람의 만남이 단순한 이해관계에서 이루어진 게 아니라고 말한다. “평소 정훈탁 대표가 박광수 감독님의 작품을 매우 좋아했다. 언제나 자신이 구상한 아이디어를 영화화할 감독으로 1순위에 꼽곤 했었고, 나 역시 <눈부신 날에>의 소재와 박광수 감독님이 만나면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궁금했다.” 전작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영화를 생각하고 있던 박광수 감독에게 정 대표의 제안이 반가운 소식이었던 건 당연한 일. 직접 각본작업에 참여해 이야기를 매만진 그는 <눈부신 날에>에 이전처럼 관객에게 이성적인 판단을 요구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눈물과 유머, 감동을 담으려 노력했다. “과거에는 영화와 관객 사이에 비평이나 영화제 같은 매개체가 있었지만 지금은 관객과 영화가 직접적으로 만나는 시대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도 함께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눈부신 날에>에서, 그의 전작들에서 나타난 관심사가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사회로부터 소외된 자들의 삶은 여전히 비루하고 그들이 살고 있는 공간과 사회의 거리는 칠수와 만수가 서있던 극장 옥상과 도시 사이의 간극 만큼이나 멀리 있다. 혹시 이번 영화는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가 아닐까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눈부신 날에>가 박광수 감독의 영화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지, 아니면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유독 튀는 작품으로만 남을지는 영화가 관객을 만난 뒤에 알 수 있을 것이다.

박광수 감독 인터뷰

“영화를 처음 만난 사람처럼 시작하려고 했다.”

-예전 인터뷰에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개봉한 뒤 영화의 영향력에 대해 자문했다고 했다. =영화를 통해서 구체적인 행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다만 한국사회가 전반적으로 좀더 지적인 사회로 가야 하지 않을까 싶었고, 그 과정에서 내 작품을 연결해보고 싶었다.

-<눈부신 날에>에 이르기까지 감독 자신의 눈에 비친 세상의 변화는 어떤 모습이었나. =이제는 영화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세계와의 관계를 알아야 예측이 가능할 거 같더라. 내가 옛날에 영화를 만들 때처럼 하면 그냥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밖에 할 게 없을 것 같았다. (웃음) <눈부신 날에>를 만들 때는 이전처럼 관객을 영화와 이화시킨 상태에서 생각하게 만드는 방식을 버리기로 했다. 관객의 비유를 맞추려고 했던 것은 아니고, 나 역시 예전 작품들 같은 영화에 재미가 없었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이전과는 다른 방식이 필요했을 것 같다. =우선 인력구성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유영길 촬영감독처럼 경험이 풍부한 원로 영화인과 함께했지만, 이번에는 새로운 감수성을 가진 젊은 세대와 함께했다. 또한 <눈부신 날에>에서는 배우의 연기를 통해서 관객과 소통하는 것에 힘을 실었다. 관객 입장에서는 영화의 미장센보다도 배우를 먼저 보기 때문에 배우를 중심으로 연출하고 부가적으로 공간과 미술을 가져가려고 했다.

-오랜만에 복귀한 현장에서 낯선 점은 없었나. =<아름다운 청년…>을 끝내고 한동안 몸이 안 좋아서 쉰 적이 있다. 이후에도 부산영화제 일을 했고, <이재수의 난> 때문에 제주도에 가 있으면서 영화계와 떨어져 있던 공백기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더라. 남들은 다 아는데, 나만 모르는 것이 있다는 사실에 충격받았다. (웃음) 무엇보다 현장의 변화를 상당히 많이 느꼈다. 스탭에 대한 대우도 훨씬 좋아졌고, 다들 젊어졌다. 하지만 부분적으로 전문화되면서 동시에 구력이 약한 면이 있더라. 변화가 빠르다보니 하나의 포지션에서 숙련된 능력을 기르기는 힘든 것 같았다.

-<눈부신 날에>는 전작에 비해 눈물이 많은 영화다. 그런 감정을 조율하는 것은 처음 아니었나. =쉽지 않은 문제였다. 관객을 영화의 감정에 동화시키면서도 만드는 주체의 의도가 심하게 느껴지지 않게 하는 선이 어디까지인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눈물을 보여주는 방식도 일반적인 대중영화처럼 찍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종대가 한 단계씩 변화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었다. 울고 있는 아이의 얼굴만 쭉 보여주는 건 옛날에나 하던 방식 아닌가.

-하지만 그런 변화 속에서도 버리지 않으려 했던 건 있었을 것 같다. =그러면 안 될 것 같더라. 모든 걸 버려야만 변할 수 있다고 봤다. 만약 예전과 같은 주제의식을 가진 채 영화를 만들려 했다면 논리적인 혼란도 있었을 것이고 찍다가 조금 아닌 것 같으면 아예 다시 옛날 방식을 사용하게 됐을 것이다. 영화를 처음 만난 사람처럼 시작하려고 했다.

-<눈부신 날에>의 종대도 전작의 인물들처럼 소외된 계층의 사람이다. 그런 관심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것 같았다. =영화 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친숙한 인물일 수밖에 없다. 요즘은 다르지만, 과거에 영화를 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평가됐다. 집에서 내쫓겨서 고생하면서 영화를 만드는 경우가 다반사였으니까. (웃음) 그런데 종대는 단순히 소외된 사람으로만 볼 수 있는 남자는 아니다. 그가 살고 있는 공간이 바로 그 자신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쓰레기가 쌓인 곳이지만, 그 안에는 닭도 있고 화초도 있다. 버려진 공간이지만 자연스러움이 살아 있는 곳이다. 종대 역시 지금의 우리가 잃어버린 원초적인 모습을 간직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를 통해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차기작으로 준비하고 있는 작품도 <눈부신 날에>의 연장선에 있는 영화인가. =<눈부신 날에>보다 더 발전적으로 가야 한다고 본다. 기존에 해오던 것을 또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좀더 독특하고 더 호흡하기 쉽고 재미있는 방식을 찾아가야 한다. 생각하고 있는 이야기들은 많이 있는데, 지금 영화의 반응을 보고 다시 고민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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