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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스파이더 맨은 아직도 철들지 않았다

판타지 세계의 법칙에 충실한 <스파이더맨 3>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이 있습니다. 일단 액션부터 시작해보자. <스파이더 맨> 시리즈를 보는 큰 이유는 역시 액션이다. 스파이더 맨의 액션은 거미줄을 이용한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거미줄을 이용하여 뉴욕의 고층빌딩 숲 사이를 날아다니고, 물체를 잡거나 집어던지고, 거미줄의 탄력을 이용하여 공격이나 방어를 한다. 슈퍼맨처럼 중력을 무시하고 자유자재로 움직이거나, 지상전 중심인 배트맨의 액션과는 많이 다르다. <스파이더 맨>에는 여타의 슈퍼히어로와는 확실하게 구분되는 독특한 ‘액션’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스파이더 맨>의 가장 특징적인 움직임은 수직으로 뻗은 고층빌딩 사이를 횡으로 가로지르며 날아다니는 스파이더 맨이다. 위아래로 솟구쳤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며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는 스파이더 맨의 모습은, 롤러코스터의 움직임을 보는 것 같은 상쾌한 느낌이 든다.

<스파이더맨 3>가 첫선을 보이는 액션은 뉴 고블린과의 싸움이다. 호버보드를 타고, 닌자가 사용할 법한 칼이나 폭탄 등을 이용하여 싸우는 공중 액션은 <스파이더 맨> 시리즈의 특징을 확연하게 드러낸다. 텅 빈 공중에서 싸운다면 스피드가 앞서고 상하좌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뉴 고블린이 우세한다. 하지만 스파이더 맨은 자신에게 유리한 지형으로 뉴 고블린을 끌어들인다. 그것은 빌딩과 빌딩 사이의 좁은 틈이다. 빌딩 사이에 비상계단과 파이프가 어지럽게 늘어선 공간에서, 거미줄의 원심력과 탄력을 이용한 스파이더 맨의 움직임은 가히 환상적이다. 이어서 스파이더 맨의 능력을 흡수한 외계물질 심비오트 덕에 스파이더 맨의 능력을 그대로 복제한 베놈과의 대결이나 거대한 ‘골렘’으로 변한 샌드맨과의 싸움은 슈퍼히어로물에서 기대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액션을 과시한다. 클라이맥스의 2:2 배틀까지 <스파이더맨 3>의 액션은 차고 넘친다. 3부작으로 끝낸다는 말도 있었던 것처럼, 샘 레이미는 <스파이더맨 3>가 마지막이라도 되는 것처럼 만화적 액션의 끝장을 보게 해준다.

사춘기 소년들의 이전투구

스파이더 맨 vs 뉴 고블린, 스파이더 맨 vs 샌드맨, 스파이더 맨 vs 베놈 등으로 이어지는 액션 사이사이에 피터 파커를 둘러싼, 다소는 익숙한 갈등이 전개된다. 60년대 <스파이더 맨>이 처음 등장했을 때 인기를 끈 이유는 피터 파커가 ‘보통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피터 파커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초인이기 이전에 만화의 주요 독자층이었던 청소년들이 공감할 수 있는 사춘기적 감성과 고뇌의 슈퍼히어로였다.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 맨>도 원작의 기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1편에서 피터 파커는 힘을 가지게 된 자신의 ‘책임’에 대해 갈등하고, 2편에서는 사회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고뇌한다. 힘을 가진 자의 책임은, 타인을 위해 힘을 쓰는 것이다. TV시리즈로 만들어진 <스파이더 맨>에서는, 거미의 예지능력으로 사고를 미리 느끼는 스파이더 맨이 인명을 구조하는 것으로 에피소드를 이끌어간다. 2편은 단순한 타인의 ‘구조’에서 조금 더 나간다. 그래, 타인을 위해 힘을 쓰는 것은 좋다. 하지만 나 하나 일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데, 내가 타인을 돕겠다고 나서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 아닐까? 가면을 쓰고 타인을 위해 헌신하지만, 피터 파커는 여전히 가난하고 지치고, 사랑조차 이룰 수 없는 ‘열등’한 인간이다.

그건 피터 파커만의 고민이 아니다. 사회에 나간 초년생이라면 많이 느낄 법한 생각이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세상은 나를 알아주지 않아, 내가 과연 세계를 바꿀 수 있는 걸까? 2편의 악당 옥토퍼스 박사 역시 똑같은 고민을 안고 있었다. 대대로 <스파이더 맨> 시리즈의 악당은 모두 스파이더 맨의 거울 같은 존재다. 고블린은 자신의 마음속에 잠자고 있던 사악한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는 존재다. 스파이더 맨은 고블린처럼 힘을 사용하고픈 내면의 욕망을 이기고, 책임을 깨달아야 한다. 2편의 옥토퍼스 박사는 피터가 존경하던 과학자지만, 세상에서 외면당한다는 소외감 탓에 악을 택한다. 그건 피터가 느끼는 고민이기도 하다. 자신은 누구보다도 노력하지만, 사랑하는 메리 제인은 점점 멀어지고 직장에서 성공하기도 힘들다. 3편의 블랙 스파이더 맨은, 바로 피터 파커 자신이다. 스파이더 맨은 마치 자신을 투영해낸 듯한 악당들과 싸우면서, 자신이 극복해야 할 내면의 갈등을 하나씩 이겨낸다. <스파이더 맨> 시리즈는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슈퍼히어로물이다.

3편을 보면, 우리의 ‘친근한 이웃’ 스파이더 맨은 아직도 철이 들지 않았다. 사회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은 스파이더 맨이지만, 그러한 상황에 너무 빠져들어서 문제다. 현실에 대비한다면, 이제 스파이더 맨은 ‘연예인’이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연예인이 웃음을 주거나 감동을 주는 것처럼, 스파이더 맨은 모든 이웃에게 안전과 평화를 안겨준다. 그건 좋은 일이지만, 피터는 스타의식에 빠져 주변을 돌아보지 못한다. 오로지 자신의 눈에 비친 세계만이 보일 뿐 다른 사람들이 그 세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생각하는지를 무시해버린다. 메리 제인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스타가 된 것처럼 너도 될 수 있고, 이 세상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야, 라는 환상에 빠져 있다. 메리 제인이 얼마나 절박한 상황에 빠져 있는지, 피터 파커는 단 한번도 돌아보지 않는다. 자신이 자기 중심적인 인간임을 알고도, 삼촌을 죽인 진범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고는 복수심에 사로잡혀 다시 메리 제인을 내팽개쳐둔다. 소심한 피터 파커는 <스파이더맨 3>에서 유아독존형 스타로 다시 한번 변화한다.

요즘 슈퍼히어로물의 특징은 선과 악을 구분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엑스맨>의 매그니토가 그렇고, <배트맨2>의 펭귄맨이 그랬다. 혹은 데어데블이나 스폰처럼 슈퍼히어로가 아예 선악을 넘나들기도 한다. <스파이더 맨>은 늘 악당이 마지막에 회개하는 식으로 끝났지만, 3편에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간다. 3편에서는 선과 악이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선과 악의 개념조차 희미해진다. 피터가 블랙 스파이더 맨으로 변한 다음에 하는 일은, 기껏해야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정도다. 삼촌을 죽인 샌드맨에게 복수하고, 자신을 버린 메리 제인에게 치욕을 안겨주려 한다. 이유도 방법도 치졸하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든다. 그건 악이라기보다는 어리석음이다.

순수하게 ‘악’을 추구하는 것 같은 베놈도 마찬가지다. 베놈의 정체는 에디 브룩이라는, 사진기자 피터 파커의 경쟁자다.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 어떤 협잡과 사기라도 마다하지 않는 현대 젊은이의 표상 같은 존재. 자신이 쓴 속임수 때문에 모든 것을 잃고도, 에디가 증오하는 것은 피터와 스파이더 맨이다. 자신의 과오와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모든 책임을 외부로 돌리는 것이다. 베놈이 되어서도 목적은 스파이더 맨에게 복수하는 것 하나뿐이다. 사실 그것도 악이라고 부르기는 좀 꺼려진다. 게다가 영화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만화 속의 베놈이란 캐릭터 자체가 ‘악’이 아니다. 베놈이 유아적인 복수와 집념에 사로잡힌 존재라면, 샌드맨은 고독한 생활인이다. 병에 걸린 딸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강도짓을 하고 실수로 피터의 삼촌을 죽인다. 자신의 행동이 잘못이었음을 명백하게 알고 있다. 하지만 딸을 구하기 위해서, 그는 어쩔 수 없이 범죄를 선택한 것이다. 그것 역시 악이라고 부르기는 힘들다. 뉴 고블린도 마찬가지다. 오로지 아버지의 원수라는 이유만으로 스파이더 맨을 공격하지만, 그건 피터와 마찬가지로 어리석기 때문에 빠져든 함정이다. 결국 <스파이더 맨> 시리즈는, 샌드맨 정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춘기의 유아적 행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년’들의 이전투구인 셈이다.

이야기는 이미 완결됐다

<스파이더맨 3>는 전작들을 수렴하여 하나의 완결 구조를 향해 나아간다. 여전히 원한관계를 남겨두었던 전작들과는 다르다. 뉴 고블린과 베놈은 죽고, 샌드맨과는 화해한다. 아마도 샘 레이미는 3편에서 스파이더 맨의 마무리를 지을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1편부터 시작되었던 모든 관계들은 확실하게 종지부를 찍었고, 이제야말로 피터는 성인이 되었다. 무리하게 2시간20여분 동안 3명의 악당을 등장시킨 것은, 그들 모두에게 주어진 역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역시 샌드맨이다. 그가 해주는 말은 단 하나 ‘선택’이다.

사실 슈퍼히어로물은 일종의 운명론에 기초한 드라마다. 어떤 사건으로 초인이 되었고, 그 때문에 끊임없이 싸워야만 하는 가혹한 운명이 주어졌다. 운명을 거역할 수 있는 방법은 없고, 괴로워하다가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을 받아들임으로써 진정한 영웅으로 재생하는 것이 일반적인 영웅 신화의 법칙이다. 하지만 샌드맨은 선택이란 말을 던진다. 거미에게 물린 것은 우연이다. 그걸 운명이라는 말로 대체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모든 인생이 바뀐다는 것은 아니다. 샌드맨의 딸이 아픈 것은 운명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그가 강도를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처절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버리고 순결한 슈퍼히어로의 길을 가는 것 역시 하나의 선택일 뿐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에게 위험이 닥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고독한 영웅의 길을 가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다. 그 선택이 희생이라고 믿는다면 하지 않는 게 낫다. 자신이 정말로 원하기 때문에, 영웅 노릇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아도취에 빠지지 않는 게 필요하고.

물론 그 모든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얼마나 비현실적인 상황인지 샘 레이미도 잘 알고 있다. 샘 레이미는 <스파이더맨 3>를 더욱더 만화적으로 만든다. 복잡한 등장인물들간의 관계를 병렬적으로 끌어가면서, 만화적인 유머와 상황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거기에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액션장면들을 더하면 <스파이더맨 3>는 더욱더 만화적인 공간으로 구성된다. 기묘한 것은 <엑스맨>과 <스파이더 맨>이 성공한 이유는 슈퍼히어로들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이 대단히 현실적이고, 그들이 벌이는 활극이 정말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처럼 사실적이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현실성’을 더욱 깊게 추구하면 할수록, 오히려 슈퍼히어로물은 더욱더 만화적이 되어버린다. 아무리 현실적이라 해도, 슈퍼히어로의 세계는 역시 ‘판타지’인 것이다. 그리고 샘 레이미는 판타지 세계의 법칙을 피터 잭슨 못지않게 잘 숙지하고 있는 감독이다. <스파이더 맨>의 4, 5편을 여전히 기대하는 것은 그런 이유다. 이미 이야기의 완결은 지었으니까. 기왕이면 다른 차원의 스파이더 맨이 등장해주면 좋겠다. 샘 레이미가 창조했던 <다크맨>의 향취가 풍긴다면 더욱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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