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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영화] <유로파> 박형서 작가
2007-06-01

표현의 힘을 깨닫다

6년 전, 이런저런 이유로 서울을 떠나 충청도의 어느 조그만 읍에 머무르게 되었다. 나는 그곳에서 20대의 마지막 해를 보내야 했다. 가족도 친구도 없었다. 정말 심심했다. 100년 전에 누군가가 이미 썼던 글을 마치 내 글인 양 끼적이거나, 이따금 눈에 띄는 절지동물들을 학살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어쩌다 한국어가 그리워지면 유일하게 전파가 잡히는 채널인 교육방송을 켜놓고는 강사가 하는 말을 따라했다. 그렇게 몇달 지나니 턱 양쪽에 딱딱한 멍울이 느껴지면서 귓불에는 털이 나기 시작했다. 보름달을 보면 가슴이 환희로 부풀었다. 나는 조금씩 늑대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친구들과 어울려 화려한 네온사인 아래의 왕자님으로 군림하던 지난 시절은 아득해지고, 사람이 평소에 어떻게 살아가는지 또 다른 사람들과는 어떻게 지내는지조차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결국 인간세계를 관찰하기 위해 내가 택한 방식은 영화 관람이었다. 인근에는 영화관이 없었으므로 자연스럽게 비디오 대여점을 들락거렸다. 그 지역에는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이들이 많았던지 새로 출시된 비디오를 빌리려면 종일 대여점에 죽치고 있어야 했다.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대신 철지난 영화를 매일 예닐곱편씩 빌려서는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유로파>를 만나게 되었다. 뭐랄까, 몸에 전기가 흐르는 기분이었다. 전기배선이 엉망인 집이었지만 진짜로 감전된 건 아니었다. 나는 그야말로 진지하게 영화에 빠져들었다.

전후 폐허가 된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배경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주인공인 케슬러는 젠트로파 철도회사에서 운영하는 기차의 침대칸 관리인이 되었는데, 점령국인 미국의 시민이라 정치적 상류층에 속한 그를 둘러싸고 암살, 배신, 빨치산, 과거사 청산 등의 묵직묵직한 이야기들이 탁류처럼 뒤섞여 흐른다. 나는 그 흐름에 휩싸여 영화를 보는 내내 혼란스러웠다. 제정신인 등장인물은 하나도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모두가 악하거나, 악에 가까울 정도로 약했다. 선악의 경계는 무참히 무너지고 모호해졌다. 영화에도 인용되다시피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뜨겁거나 차거나 어느 한쪽을 강요하신다. 하지만 무엇이 옳은지 모르는 상황이라면, 혹은 양쪽 모두 선이나 악으로 판단되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지옥의 형벌이 코앞에 놓여 있더라도 결코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 없는 상황, 그게 바로 폐허다. <유로파>는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모든 것들이 파괴된 전후 독일사회의 ‘폐허’를 너무나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내게 좀더 충격적이었던 건 폐허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표현방식이었다. 부분적 컬러기법에서 느껴지는 묘한 질감, 현란한 영상기교, 기차라는 한정된 공간이 발산하는 음울한 정신병리학적 효과 등은 할리우드영화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장치였다. 특히 일부만 비춰진 어두운 철길을 따라 달리다가 “내가 열을 세면 당신은 영화 속에 들어가 있게 된다”며 불길한 목소리로 최면을 거는 듯한 액자식 도입부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그토록 무수한 이야기가 이미 발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 까닭은 다른 시각이 가능하다는 믿음에 기인한다. 독창적인 이야기가 사라진 시대에, 독창성에 대한 욕망은 그 믿음과 반응해 독창적인 표현을 만들어낸다. 오늘날 위대한 예술가는 제각기 자신만의 독특한 표현을 발명한 이들이다. 그들에게서 표현을 제거하면 무엇이 남을까? 별로 색다를 것 없는 비슷비슷한 이야기들만 남는다. 그런 이야기로는 결코 우리를 감동시킬 수 없다. 영화를 비롯한 모든 서사장르에 있어 ‘순수’는 ‘기교’의 반대가 아니라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 즉 기교의 일종이다. 순수하건 순수하지 않건 이야기만으로는 어떠한 힘도 가지지 못하며, 마음 깊은 곳에 접근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를 울리고 웃기는 건 그 이야기를 실어 나르는 표현방식이다. 표현방식이 이야기에 절묘하게 흡착되어 요철 없이 통일성을 이룰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부드럽게 감동에 젖어든다. 그게 바로 내가 20대의 마지막 해에 <유로파>를 보며 얻은 교훈이다.

말은 거창하게 해댔지만,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보니 어쩐지 지루한 감이 있다. 아마도 6년 전에는 내가 무지하게 심심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로파>는 여전히 표현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남들이 아니라고 아무리 우겨봤자 소용없다. 내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그 얘기는 이만 끝.

사족을 붙이자면 이 영화의 감독인 라스 폰 트리에는 특수효과 등 기교가 판을 치는 할리우드에 대항해 도그마95를 주도했다고 한다. 어딘가 좀 이상한 일이다. 그럼 감독님, 2003년에 발표하신 영화 <도그빌>은 대체 어찌된 건가요? 일체의 세트와 소품을 배격하고 로케이션 위주로 가자며? 응? 살인과 폭력은 등장시키지 않는다며? 응? 기교는 싫다며? 응?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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