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웃다 죽었으면 좋겠다”
2001-10-19

<킬러들의 수다> 장진 감독, <플란다스의 개> 봉준호 감독과 대담, 혹은 수다 150분 (1)

“그렇게 디테일이 살아 있는 코미디는 처음 봤어요.” “질문할 거 생각하며 거리를 두고 보려 했는데 금방 몰입이 돼서 정신없이 웃다 나왔어요.” 두 감독은 서로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평소 특별한 친분이 있던 사이는 아니지만 장진과 봉준호는 ‘나를 알아주는 그대’를 한눈에 알아본 듯했다.

<킬러들의 수다>와 <플란다스의 개>에 어떤 공통점이 있었는지 떠올리면 두 감독의 친화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이상한 코미디’라고 할 수밖에 없는 두 영화는 낯설고 신선한 웃음을 보여준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공포와 긴장감이 폭소로 돌변하던, 아파트 경비 아저씨 보일러 김의 장광설을 기억하는지? <킬러들의 수다>에서 원빈의 감동적인 연설에 키득키득 웃음을 참지 못하는 녀석들은 어쩐지 <플란다스의 개>의 보일러 김과 내통한 듯 보인다.

참을 수 없는 진지함에서 폭소를 불러오고, 엉뚱한 소동에서 삶의 에너지를 충전시켜주는 그들은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프로페셔널 광대들이다. 강퍅한 현실을 돌파하는 유희정신의 힘을 실감케 하는 장진과 봉준호의 유머감각은 ‘21세기적 상상력’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중국 최대 명절이라는 쌍십절, 10월10일 저녁 장진 감독이 대표로 있는 문화창작집단 수다의 사무실에서 진행된 인터뷰는 시종 근엄하고 진지한 분위기를 물리치며 진행됐다. 그들 영화에 드러나듯 선천적인 코미디 감각을 뿌리칠 수 없는 두 사람은 조금 지루해질 만하면 실감나는 연기까지 보태가며 참관자의 귀를 즐겁게 했다. <킬러들의 수다>를 둘러싼 장진과 봉준호의 유쾌한 수다를 들어보자. 편집자

봉준호(이하 봉) 현장이 아주 재미있었다고 들었어요. <간첩 리철진> 찍을 때도 하도 재미있게 일해서 모든 스탭들이 감독님과 웃기는 이야기하면서 떠들다가 “그런데 우리가 왜 안 찍고 있지?”, “다 찍었잖아” 그랬다던데. (웃음)

장진(이하 장) 난 촬영현장에 조크가 없으면 죽어버릴 것 같아. 긴장하는 것 싫어하고. 농담이 없으면 밤도 못 새워요. 힘들어서. 그럴 때가 있어요. 현장에서 다음 장면 세팅하는 동안 웃고 떠들다가 문득 주위가 너무 조용한 것 같아서 “그런데 뭐가 아직 안 된 거지?” 물어보면 “세팅 아까 끝났는데요” 그러는 거야.(웃음)

봉 <킬러들의 수다> 보면 되게 웃긴데, 몰아붙이거나 강요하는 느낌이 없거든요? 미묘한 뉘앙스로 쬐그만 걸로 웃기기 때문에 찍는 입장에서는 컨트롤을 한다 해도 순발력이 상당히 필요할 것 같던데.

장 리허설 때 대사 연습은 끝내요. 그래서 현장이 여유있어요. 리허설을 충실히 하면 현장에서 다른 장면 찍기가 참 좋아요. 좀 변화를 줘서 다시 해볼래, 해도 마스터가 있기 때문에 배우들이 안 흔들려. 원빈이 절창할 때 “정우형은 지금 사랑을 하고 있어. 형은 모를 거야”까지 하고 11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그때부터 사람들은 웃을 거야, 했는데 그건 좀 일찍부터 웃기 시작하더라고.

봉 그 장면이 압권이었는데, 그게 이 영화의 핵심인 것 같아요.

장 근데 그게 킬러에서 연기자들에게 요구했던 코미디의 가장 정석적인 부분이었어요. 장난은 시나리오에서 칠 테니까 너희는 진실을 보여줘라. 원빈은 대사 두 마디 하니까 눈에서 눈물이 죽 흘러요. 그게 ‘꼼짝마’ 코미디거든요. 배우들의 절실함과 진실함이 원체 폭이 크니까 관객이 보기에 조금씩 삐끗하는 게 보이는데도 아, 저거 웃으면 안 되지 그러면서 꼼짝 못하고. 그러다보면 어느새 이만큼 옆구리에 웃음이 와 있거든요.

봉 그 대목에서 정재영씨 얼굴이 제일 먼저 나오지요. 옆에 앉아 있던 관객 얼굴을 살펴봤는데 반응이 재미있더라고요. 세명이 나란히 앉았는데 처음 약간 둔한 관객이 몰입해야 되는 줄 알고 “어후, 닭살이야-” 그러더라고요. 그러자 옆에 있는 애가 “일부러 그러는 거야, 일부러” 하고 가르쳐주면서 웃기 시작해요. 그러다 십몇초 지나고 나니까 둔했던 친구도 따라오면서 뒤집어지기 시작하더라고. 난 너무 통쾌했어요. 한국영화 중에 몰입을 강요하는 게 많잖아요. 관객은 안 울고 있는데 배우들이 먼저 울어버리는. 관객은 쟤 왜 화내고 있지? 그러는데 배우는 나 지금 화내잖아! 그러는 거. 근데 <킬러들의 수다>에서 원빈이 절창하는 대목은 한국영화에서 흔히 강요하는 그런 몰입을 조롱하는 거라 되게 통쾌하더라고요.

신현준, `장진의 배우'로 거듭나

봉 전 신현준씨 연기가 아주 좋았어요. 프롤로그에서 오영란 차에 탔을 때도 부탁하니까 “오우, 아, 예…” 이러잖아요. 그 장면 보니까 <은행나무 침대>에서 “너희가 고독을 알아!” 하고 소리치던 장면 생각도 나면서 되게 좋더라고요. 진작에 저 양반이 저런 걸 했어야 했는데 이제야 하는구나. 다행스럽고 좋고 매력적이더라고요. 본인도 하고 싶어했어요?

장 사실 이 영화 하면서 개인적인 오기 같은 게 있었다면 신현준씨 연기폭이 얼마나 넓은지 보여주는 것이었요. 보면 다 신현준은 저런 배우, 저런 역만 해야 돼 하는데 그게 본인이 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연출자들이 다른 걸 못 시켜. 자기들이 못해놓고 배우 탓을 하는 게 싫었어요. “자, 니들은 신현준 데리고 맨날 똑같은 거만 하라고 하지만 난 다른 걸 보여주겠다” 하는 욕심이 있었어요. 킬러들, 우리 모두의 대변자

봉 그래도 처음엔 적응하기 힘들었을 것 같은데.

장 본인이 코미디에 대한 강박관념이 좀 있었어요. 우리가 아는 코미디를 하더라고요. 코미디인데 이렇게 해야 되는 게 아니냐, 그래서 안 그래도 된다, 작게 할수록 더 웃긴다고 설명했죠. 현장에서 딱 두 마디면 됐어요. 좀만 더요, 혹은 좀 죽여요. 리허설에서 끝났기 때문에 감정이 이래야 된다는 얘기는 필요없고 현장에서 양조절만 하면 됐어요. 끝나갈 무렵엔 내가 가까이 다가가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면서 한숨 한번 쉬고 오면 무슨 소린지 알았어요.

봉 킬러로 나온 배우 네명, 밸런스 맞추느라 힘들지 않았나요.

장 신현준씨한테 고마워요. 다른 친구들을 정말 잘 챙겨줬어요. 한달간 리허설한 건 물론이고 다른 세 친구들하고 계속 어울렸어요. 매일 같이 만나서 밥 먹고 술 마시고.

봉 벌써 3번째 장편영화를 만든 중견감독인데요. (웃음) 인터넷영화 <극단적 하루>도 있고. <극단적 하루>가 어떻게 보면 출발점 같은 거구나 생각이 들었는데 눈에 띄게 확 다른 게 신현준이 의뢰인들과 커다랗게 사진 찍어 벽에 걸어둔 것 있잖아요. 묘한 감동이 오기도 하더라고요. 거기 있는 사진들의 서민적인 얼굴 같은 것들이. 그런데 반대로 <극단적 하루>에서는 죽인 사람들 얼굴이 있더라고요. 그게 무슨 차이일까요.

장 화두가 바뀌었어요. <극단적 하루>는 오해와 포장이 과대해진 사회거든요. 그러니까 얘는 아무것도 못하는 앤데 오해와 포장으로 엄청난 애가 돼서 엄청난 일을 하게 되잖아요. 그래서 결국엔 상실된 진실이 거짓이었는데 진실이 되어버리잖아요. 그런 것에 대한 이야기였고. 이번에는 의뢰인들에 대한 얘기였거든요. 그런 에피소드들이 원래 시나리오에서 많이 날아갔어요. 살았으면 그런 화두가 잘 살았을 텐데.

봉 킬러들 이야기를 생각한 계기는요? 누군가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나쁜 감정이 있고, 그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사람이 오히려 피해자요, 억눌린 사람이다, 이런 것에서 출발한 건가요?

장 커다란 의미에서 출발하진 않았고, 꼭 굳이 킬러가 아니라도 좋아, 조폭이라도 좋고. 용역센터에 있는 사람들도 생각해봤고. 누군가가 뭔가 바라요. 누군가의 바람을 들어주는 사람의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우린 살면서 대개 좋은 걸 바라잖아요. 너 소원이 뭐냐 그러면 뭐가 되고 싶어요, 뭐가 되고 싶어요. 그런데, 해피한 것말고 너 바라는 게 뭐냐 그러면 난 저 새끼가 망했으면 좋겠어, 이런 바람 있잖아요. 왜 100만명이 들어, 그런 영화에. (웃음) 이런 심정들 만연하고 우리가 본의 아니게 순간순간 저 사람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 드는 게 너무너무 싫어요. 내 작가노트에 농담삼아 쓴 문구가 있어요.

‘옛날에는 가장 심한 욕이 어휴 저 나쁜 놈, 가다가 콱 넘어져라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고 하던데, 요즘은 초등학생 애들이 서로 싸울 때 저 개XX 확 죽여뿔라 이런다. 요즘은 화가 나서 싸울 때 누군가를 꼭 죽여야 되며, 죽이기 전에 항상 동물을 만들어야 되며…’, 그런 것들이 만연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 얘기죠. 첨엔 누군가의 부탁을 들어주는 사람의 이야기를 해보자로 시작했어요. 그랬는데 <극단적 하루>를 하면서 아, 이건 요 소재를 확장된 드라마로 가보자.▶ <킬러들의 수다> 장진 감독, <플란다스의 개> 봉준호 감독과 대담, 혹은 수다 150분 (1)

▶ <킬러들의 수다> 장진 감독, <플란다스의 개> 봉준호 감독과 대담, 혹은 수다 150분 (2)

▶ “새로운 것에 끌린다” - 장진 생각

▶ “저질? 관객은 다 알고 웃는다” - 봉준호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