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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이매진] 영원히 바다를 떠도는 망자의 배

<캐리비안의 해적>에 등장하는 ‘플라잉 더치맨’ 전설의 모티브와 바그너의 <방랑하는 화란인>

<캐리비안의 해적: 망자의 함>

<캐리비안의 해적>. 전편들을 안 본 상태에서 3편을 보는 것은 피곤한 일. 그래도 3시간에 가까운 지루한 상영 시간 동안 눈뜨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간간이 나오는 인상적 장면들 덕분이었다. 물고기떼처럼 죽은 자들의 사체가 물의 표면 바로 아래로 미끄러지듯이 배 옆을 스치고, 죽은 자들의 보트가 저마다 등불을 밝히고 고요한 밤바다를 별밭으로 만들며 영원의 시간 속으로 흘러간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저주를 받아 영원히 바다를 방랑한다는 ‘플라잉 더치맨’의 모티브였다.

저주받은 뱃사람

죽은 자들이 배를 타고 물을 건너는 모티브는 튜턴족의 민담에 나온다. 게르만의 신화에도 죽은 영웅을 배에 태워 땅에 매장하거나 물결에 실어 바다 위로 띄워 보내는 관습이 언급된다. 어두운 바다 위에서 죽은 자가 탄 배를 만나면 기분이 어떨까? 뱃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유령선의 전설은 어쩌면 이와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다. ‘플라잉 더치맨’은 이렇게 전세계에 널리 퍼진 전설들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뱃사람들은 바다에서 유령선을 목격하면 머지잖아 재앙을 맞게 된다고 믿는다.

‘플라잉 더치맨의 전설’에는 다소 차이가 나면서도 비슷한 여러 버전이 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따르면 ‘방랑하는 화란인’ 이전에 이미 독일에 비슷한 전설이 있었다. 거기에 따르면 팔켄베르크 선장은 어느 날 갑판에서 자신과 선원들의 영혼을 걸고 악마와 주사위 던지기를 한다. 악마와의 계약이라는 요소는 중세의 성 테오필루스에서 괴테의 <파우스트>로 이어지는 낯익은 모티브다. 내기에 진 팔켄베르크와 선원들은 최후의 심판의 그날까지 영원히 북해를 떠도는 운명이 된다. 독일 버전에서 유령선은 허공을 떠다닌다.

15~16세기에 네덜란드인들은 이 전설을 자기들 것으로 취한다. 영국에 제해권을 넘겨주기까지 바다를 지배했던 민족답게 그들은 전설의 배경을 북해에서 저 멀리 아프리카의 희망봉으로 옮겨놓는다. 네덜란드 버전의 전설에서 선장의 이름은 반 슈트라텐. 완고한 사람이었다. 당시 희망봉은 ‘폭풍의 곶’이라 불릴 정도로 뱃길이 험했다. 폭풍우 속에서도 선장은 항해를 계속할 것을 고집하다 결국 배가 침몰하고, 교만한 선장과 그의 선원들은 영원히 희망봉의 뱃길을 방랑하게 된다.

종종 구체적 사건이 전설의 배경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1641년 동인도에서 돌아오던 반 데르데켄 선장은 희망봉 근처에서 거센 폭풍우를 만난다. 사투 끝에 배는 가라앉기 시작하고, 아직 죽을 준비가 안 된 선장은 “종말의 그날까지 항해를 해서라도 희망봉을 돌고야 말겠다!”고 외친다. 이 말을 들은 악마가 정말로 그 맹세를 지키도록 저주를 내려, 그와 선원들은 종말의 그날까지 영원히 바다를 떠다니게 됐다고 한다. 여기에 사랑의 모티브가 결합하는 것은 아마 낭만주의 시대의 일이었을 게다.

화란인의 초상

이 전설은 하이네의 귀에도 들어가 그의 단편 <폰 슈나벨레보프스키의 비망록>(1831)의 소재가 된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언젠가 암스테르담에서 본 연극을 회상하는데, 거기에 한 여자의 사랑으로 선장의 저주가 풀린다는 모티브가 등장한다. ‘원래 어리석기에 악마는 여자의 신의를 믿지 않았고, 저주받은 선장에게 7년에 한번 뭍에 내려 결혼하고, 그 기회에 저주를 풀어보도록 허락했다.’ 하지만 선장은 번번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영원한 방랑의 길을 떠나곤 했다.

다시 7년 뒤 선장은 스코틀랜드에 내려 어느 귀족과 알게 된다. 그 가문의 저택에는 100여년 전부터 내려오는 방랑하는 화란인의 초상이 걸려 있었고, 그 가문의 여인들은 오래전부터 그 초상화의 실물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낭만적 감성을 가진 귀족의 딸 캐서린은 그 초상화를 보며 외려 저주받은 방랑자에게 연심을 키워오던 터였다. 그리하여 “캐서린, 내게 충실할 수 있어요?”라는 초상화 주인의 청혼에 주저없이 대답한다. “죽을 때까지 충실할 거예요.”

하지만 이번에도 선장은 사랑하는 이의 삶을 망치지 않으려고 다시 방랑의 길에 오른다. 이별의 그날 캐서린은 바닷가 절벽 위에 서서 다시 물위의 유령선을 향해 필사적으로 외친다. “이제까지 나는 당신에게 충실했고, 죽을 때까지 충실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알고 있어요.” 이 말과 함께 그녀는 파도 위로 몸을 던지고, 순간 유령선은 바다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다. 선장은 비로소 “삶과 죽음 사이에 내던져져 어느 쪽에서도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운명에서 풀려난다.

사랑과 믿음

“이 연극이 여자들에게 주는 교훈은 절대로 방랑하는 화란인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고, 우리 남자들이 이 연극에서 배울 것은, 여자를 통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가장 행복할 때조차도 몰락하는 일뿐이라는 점이다.” 하이네는 주인공인 폴란드 신사의 입에 심술궂은 코멘트를 물린다. 낭만주의적 반어랄까? 사랑이 사랑인 것은, 결과의 치명성을 뻔히 알면서도 빠져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설마 그가 몰랐겠는가.

하이네의 단편은 그 유명한 바그너의 오페라 <방랑하는 화란인>(1843)의 토대가 된다. 스토리는 거의 동일하나, 여기서 화란인 선장은 여인의 진심을 오해해 떠나기로 한다. “너는 내게 신의를 맹세했으나, 그 맹세는 영원한 분(神) 앞에서 한 것이 아니니, 그것이 너를 자유롭게 해줄 거야.” 소녀가 물결에 몸을 던지는 순간 배도 함께 가라앉는 것은 동일하나, 오페라에서는 선장과 소녀의 몸이 다시 물살을 뚫고 떠올라 함께 하늘로 올라가는 것으로 설정된다.

전설에서 선장은 7개의 바다를 방랑하다 7년에 한번 뭍에 상륙한다. <캐리비안의 해적>에서 새로이 ‘플라잉 더치맨’의 선장이 된 윌 터너 역시 10년에 단 하루만 뭍에 상륙하도록 허용된다. 하지만 영화에서 선장과 여인의 이야기는 더이상 비극이 아니다. “단 하루를 살기 위해 10년을 방랑해도 좋다.” 윌 터너는 의지와 낙관이 넘쳐흐른다. 엘리자베스 역시 전설에서 소녀가 몸을 던졌던 바로 그 절벽 위에 다 자란 소년의 엄마가 되어 남편을 기다린다. 하나도 안 낭만적이다.

디지털의 유령선

하이네의 단편에는 유령선 선원들의 재미있는 행태가 묘사되어 있다. 바다 위에서 산 자들의 배를 만나면, 그들은 산 자들에게 뭍에 사는 가족에게 전해달라고 편지를 건넨다고 한다. 그 편지들은 배의 마스트에 달아놓아야 하는데, 물론 그렇게 뭍으로 가져간 편지들은 대부분 수취인을 못 찾는다. 하지만 간혹 편지에 적힌 주소지에 누군가 살고 있어, 이미 죽어 무덤에 들어간 지 오래된 증조할머니나 고조할머니 대신에 후손들이 수백년 전 그분 남편의 편지를 받기도 한단다.

전설에서 실체없는 유령으로 지내던 선장은 7년에 한번 뭍에 상륙할 때에만 육체의 옷을 입는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체험이기도 하다. 가상과 실제의 구별이 흐려질 때, 가상은 실제만큼 딱딱해지고, 실제는 가상처럼 유령이 된다. 넷의 바다를 떠도는 아바타들도 어차피 실체가 없는 존재. 접속을 끊고 다시 뭍으로 상륙해야 비로소 우리의 정신은 다시 육체의 옷을 입는다. 플라잉 더치맨이 7년에 한번씩 겪는 일을 우리는 날마다 체험하는 셈이다.

넷의 바다에도 무모한 항해자들이 있어, 이들은 다시 육체의 옷을 입지 못한다. 종종 가상에 너무 몰두하여 아예 그 속으로 거처를 옮긴 사람들에 관한 뉴스를 듣는다. 그들은 어디에 있을까? 세계 종말의 그날까지 넷의 바다 위를 떠돌까? 그렇다면 언젠가 인터넷의 바다 위에서 이 디지털 시대의 플라잉 더치맨들과 마주칠지도 모를 일이다. 화면 위에 죽은 이의 아바타가 나타나 가족에게 소식을 전해달라고 부탁한다고 상상해보라.

마른 기술과 젖은 기술

전설에서 심연으로 가라앉았던 ‘플라잉 더치맨’이 영화에서는 아직 저주가 안 풀렸는지 물살을 뒤집어쓴 채 수면 위로 치솟는다. 심연에 있다가 떠올라서 그런지, 선원들은 하나같이 축축한 해저생물의 모습이다. 듣자 하니 처음엔 승무원을 건조한 유령으로 묘사하려 했으나, 감독의 지시로 그들의 몸에 물리적 실제성을 부여했단다.

특히 선장 데비 존스의 꿈틀거리는 문어발 수염은 매우 강렬한 인상을 준다. 이 이미지에서 마른 기술(IT)과 젖은 기술(BT)이 하나가 된다. IT는 가상과 실제의 구별을 지우고, BT는 인간과 동물의 구별을 지운다. 문어발 수염의 매력은 마른(dry) 기술을 이용해 젖은(wet) 기술의 상상을 생생한 현실로 바꾸어놓은 촉촉함(moist)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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