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내 삶의 편집권
고경태 2007-06-29

“야, 이 씨발X아!” 순간 귀를 의심했다. 설마 씨, 발, X, 아, 라니…. 선배는 전화통을 붙잡고 거의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왜 거짓말해! 집에 있으면서 왜 없다고 거짓말하냐고, 이 나쁜 놈들아.” 꽈당, 수화기 내동댕이쳐지는 소리. 뒤이은 잠깐의 정적. 나를 비롯한 동기들은 순진한 1학년이었다. 겨우 더듬거리며 선배에게 말을 붙였다. “형, 지금 장난친 거죠? 혼잣말한 거죠? 그런 거죠? 네?” 돌아온 대답은 싸늘했다. “아니.”

충격적이었다. 교수가 미웠지만 그렇게까지 나갈 줄은 몰랐다. 그 2학년 선배는 아무도 못 말리는 직선적 성격이었고 다혈질의 최고봉이었다. 3일 내내 교수 집에 전화를 걸던 그가, 시종일관 “교수님 지금도 안 계신가요?” 따위의 말투로 상냥한 척하던 그가 마침내 폭발한 것이다. 교수 부인, 그러니까 감히 ‘사모님’에게 폭언을 퍼붓다니….

때는 바야흐로 1986년 2월. ‘개헌’의 ‘개’자만 발음해도 개같이 입을 틀어막던 이른바 ‘개헌정국’이었다. 나는 대학신문을 만들던 학생기자였다. 기자들은 소박하게나마 개헌의 논리를 신문에 담으려 했다. 겁을 내던 주간교수는 어느 날 사라졌다. 인쇄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학생기자에겐 ‘편집권’이 없었다. 교수의 오케이 사인이 필요했다. 차라리 문제되는 내용을 빼라고 하면 다 들어주고 싶었다. 신문만은 만들고 싶었다. 한데 그는 집에 숨어 나오지 않았다. 불가피하게 거짓말을 해야 했던 부인은 그 뒤 전화벨 노이로제에까지 시달렸다고 했다.

웃기는 80년대였다. 변변치 않은 대학신문에까지 안기부는 보도지침을 내려 보냈다. 학생기자와 주간교수는 ‘웬수’였다. 학생들은 ‘편집권’을 달라며 징징거렸지만, 칼자루를 쥔 학교쪽에서 줄 리 만무했다. 주간교수는 ‘검토’를 하겠다며 ‘검열’을 했다. 신문을 만들 때마다 어린 학생들과 머리끄덩이를 잡고 툭탁거렸다.

조금 지난 뒤 6월항쟁이 터졌다. 6·29 선언 직후의 열린 공간에서, 학생기자들은 본격적으로 ‘편집권’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에피소드 한 토막. 1987년 9월, 나는 서울지역 대학신문 기자들의 연대 모임인 ‘자유언론실천대학신문기자연합회’(일명 자대기련) 선전국 일을 맡고 있었다. 당시 우리는 ‘대학신문 편집권’의 문제를 문교부장관에게 따지자고 뜻을 모았다. 공개서한을 작성했다. “검열제도 철폐하고 학생기자 편집권 보장하라”는 게 주 내용이었는데, 몇날 몇시에 정부종합청사를 찾아갈 테니 장관이 나와서 면담에 응하라는 ‘통고’도 함께 담았다. 우리는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놈들이었다. 4벌식 수동 타자기를 이용해 문서를 만들었다. 수정액으로 조악하게 오타를 고친 뒤 문교부 앞으로 우편 발송했다(등기우편도 아니었다). 각 언론사 사회부에 전화를 돌려 기사화해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조선인가 동아에 1단기사가 실렸다). 물론 서울 세종로 정부종합청사에 다다랐을 때, 학생기자 대표들을 맞이한 건 경찰뿐이었다. 문교부장관 면담은커녕 닭 모가지처럼 목을 비틀린 채 끌려가 닭장차에서 훈시만 들었다. 돌이켜보면 낯부끄럽다.

그 뒤엔 ‘편집권’에 관심을 가졌던 기억이 없다. 한겨레에 입사한 뒤엔 더욱 그랬다. 14년 동안 최소한 경영진의 ‘몰상식한 간섭’은 없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편집권 고민할 일은 전무했다. 내 삶의 편집권이 더 큰 화두였다. 앞으로 내 인생을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로 멋지게 편집해나갈 수 있는가 말이다.

그런데 정확히 1년 전 요맘때였다. 학생기자 시절의 해묵은 추억을 떠올리게 한 사건을 접했다. <시사저널> 금창태 사장이 편집국장을 따돌리고 인쇄소에서 기사를 삭제했다는 것이었다. 20여년 전의 주간교수처럼 참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생각’만 했으면 탈이 없었을 텐데, 글로 썼다. <한겨레21>에 쓴 ‘사장님, 그래도 됩니까’라는 편집장 칼럼이었다. 사장님 덕분에 아스라한 향수를 느꼈으므로, 감사하다는 인사도 덧붙였다. 사장님은 인사를 받지 않았다. 대신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나를 고소했다. 민사손해배상 1억5천만원에 형사로도 걸었다.

다행히도 지난 5월30일 열린 형사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검찰은 곧 항소했다. 아, 피곤해진다. 서울 교대 역 부근의 서울고등법원에 피고로 출석할 일을 떠올리니 그렇다. 내가 근무하는 곳에서 전철로 1시간 거리다. 거리로 내몰린 <시사저널>기자들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시사저널>의 진로는 나의 피부에 와닿게 절박하지 않다. 문제는 금창태 사장 때문에 내 삶의 편집권이 침해당하고 있다는 거다. 하고 싶지 않은 일에 억지로 응해야 한다는 것! 우리 사회엔 남의 인생 편집권을 침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금창태 사장은 여러 사람 침해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나도 혹시나 지금 누군가의 편집권을 침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성에 잠겨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