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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기자클럽] 떠나간 거장, 에드워드 양을 추모하다

당신의 영화를 더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에드워드 양 감독이 죽었다. 그가 우리에게 선사했던 마지막이자 아마 최고의 영화라고 할 수 있는 <하나 그리고 둘>은 나온 지 벌써 7년이나 지났다. 나는 그가 없는 세상과,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감독 중 하나이자 대만의 유일한 진정한 국제적인 감독이었던 그의 영화를 더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나는 20년 넘게 에드워드 양 감독을 단속적으로 알고 지냈다. 대만 금마장상 심사위원으로 갔던 1980년 여름 그를 처음 만났다. 어느 날 저녁 <11명의 여인들>이라는 TV시리즈의 한 에피소드를 연출하고 있던 친구가 어느 집 실내 촬영에 나를 데리고 갔다. 거기 서 있는 동안 한 30대 초반의 키 큰 중국인 남자가 유창한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알고 보니 로케이션 장소인 타이베이 뒷골목의 전형적인 반일본 양식의 목조건물이 그의 가족의 집이었다.

그는 수년간 미국에 살았는데 플로리다대학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하고 그때 시애틀로 옮겨 마이크로컴퓨터 일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 시리즈 영화연출을 위해 대만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긴 대화 끝에 그는 자기 명함을 주었고, 난 그걸 아직도 갖고 있다. 거기에는 ‘에드워드 양 필름프로덕션, 시애틀, 워싱턴 98118’이라고 적혀 있다.

<11명의 여인들>은, 그보다 2년 전에 <사자산하>가 홍콩 뉴웨이브에 무척 중요했던 것만큼이나 대만 뉴웨이브에 중요한 시리즈였다. 비디오로 촬영한 장편영화 컬렉션인 이 시리즈는 대만 여배우 실비아 창이 공동제작했으며, 여러 명의 미래의 인재들을 소개했다. 전형적으로 에드워드 양의 작품이었던 한 시골 소녀의 도시 생활에 대한 환멸을 그린 <개구리밥>은 다른 작품들의 두배 길이여서 이틀 밤에 걸쳐 방영됐다. 그의 작품은 또한 최고 작품 중 하나였다.

1980년대, 뉴웨이브가 일어나고 있을 때 나는 타이베이에 해마다 갔고, 양 감독이 타이베이에 있으면 늘 그를 만났다. 그는 때때로 초조해하고, 때때로는 더 여유로웠다. 이 시기에 주요 비평적 논쟁들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그는 늘 자신에 대해 뭐라고 쓰든지 간에 민감해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늘 연락을 이어갔으며, 또 다른 곳에서 만나기도 했다.

대만 뉴웨이브 감독 중 유일하게 영어가 유창했던 그는 한때 친구였던 허우샤우시엔과는 달리 서구인들과 쉽게 어울렸다. 양 감독은 국제적인 심미가였으며, 뛰어난 예술 애호가였다. 그는 늘 외교적 언사에 능했지만 동시에 그의 얄궂은 웃음 밑에는 사려 깊음과 진지함이 있었다.

양 감독에게 영화는 여러 관심사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는 (그의 두 번째 아내 카일리는 콘서트 피아니스트였고 그가 무척 좋아한) 고전음악, 일본 만화, 또는 (그가 90년대 초에 활동을 많이 했던, 그리고 그의 영화 중 가장 복잡한 영화 <독립시대>를 이끌어냈던) 연극에 대해서도 똑같이 즐겨 얘기했다.

기억하기로는 양 감독을 정말로 화나게 하는 것은 딱 두 가지였다. 예술에 정치적으로 편승하려는 (특히 대만의) 정부 관료와 서구인들이 아시아인들과 ‘이국적인’ 아시아 문화를 향해 생색내는 것이었다.

아시아 문화와 마찬가지로 서구 문화에 매혹되어 깊은 관심을 가진 그는 일관성있게 현대 도시 생활의 장에서의 그 둘의 갈등을 냉정하고 예리한 정신으로 다뤘다. 그의 영화들은 또한 양쪽 세계에서 아웃사이더로 인식됐던 그가 두 세계 모두에 다리를 걸치고 있으려 하는 분투를 반영한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건 <하나 그리고 둘>이 최고 감독상을 받았던 2000년 칸이었다. 우리는 주로 대만의 ‘지난 시절’의 추억에 잠겨 얘기했다. 그는 자기 인생의 영화적 작업이 이미 다 완료된 것처럼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그는 차기작에 대해 전혀 서둘러 얘기할 마음이 없었지만, 암과의 싸움은 그때 막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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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조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