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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봅시다] 파리에서 온 욕심 많은 그녀
안현진(LA 통신원) 2007-07-19

<뉴욕에서 온 남자, 파리에서 온 여자>에서 각본, 연출, 제작, 편집, 작곡, 주연까지 소화한 줄리 델피

햇살이 비치는 파리 시내를 프랑스인 여자와 미국인 남자가 이야기하며 걷는다. 줄리 델피가 각본, 연출, 제작, 편집, 작곡, 주연까지 무려 1인6역을 소화한 <뉴욕에서 온 남자, 파리에서 온 여자>(이하 <뉴욕, 파리>)는 <비포 선셋>과 외피는 닮았지만, 영화가 시작하면 이내 속속들이 다른 면을 보여준다. 감독의 꿈을 이루기 위해 20년 동안 ‘덤 블론드’가 아님을 증명해야 했다는 줄리 델피. 연기도 사랑하지만 나이와 겉모습에서 초연할 수 있어 작가이고 감독이고 싶은 그녀에 대한 몇 가지.

<뉴욕에서 온 남자, 파리에서 온 여자>

<뉴욕, 파리>

베스트셀러가 된 남녀관계서 덕분에 쉽게 내용이 짐작되는 <뉴욕, 파리>의 원제는 <파리에서의 이틀>이다. 연애 초기의 열정을 되살리려 떠난 여행의 끝을 여자의 부모가 사는 파리에서 보내기로 한 2년차 커플 마리옹와 잭. 마리옹에게 파리는 고향이지만 잭에게는 끝나지 않은 여행의 일부다. 잭의 ‘파리에서의 이틀’을 지옥으로 만들어주는 데 톡톡한 역할을 하는 마리옹의 부모는 실제로 배우인 줄리 델피의 친부모인데, 이들은 <비포 선셋>에서 제시가 셀린느를 집에 바래다주는 장면에서 가든파티를 벌이는 이웃으로 이미 딸과 함께 출연한 바 있다. “모두가 로맨틱하다고 여기는 도시에서 관계가 위태로워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줄리 델피의 첫 장편상업영화 <뉴욕, 파리>는 HD로 20일 동안 촬영했으며, 제57회 베를린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에 진출하며 화제가 됐다. 어떻게 그처럼 많은 역할을 해낼 수 있냐는 질문에 “영화의 모든 디테일을 알아야 하는 강박관념 때문”이라는 겸손한 모범답안을 내놓기도.

배우에서 감독으로

양친이 생계형 배우였기 때문에 무대 뒤에서 자란 델피에게 연기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십대 후반에 감독의 꿈을 품은 그녀는 12분짜리 단편 <블라 블라 블라>(1995)를 통해 감독 데뷔했고, “실험에 가까운” 장편 <지미를 찾아서>(2002)를 연출했다. 연출자로서 델피는 현실적이다. 심각한 주제에 대해서 성찰할 만큼 오래 살지도 않았지만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영화로 만드는 과욕을 부리지 않겠다는 것. 동시대 사람들이 말하는 폭력, 불안, 미성숙 등이 그녀의 화두다. 그렇다고 연기를 포기할 생각은 아니다. 우디 앨런의 배우와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의 감독이 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질문에 “밤을 새워서라도 둘 다 하겠다”고 한다. 감독 줄리 델피의 차기작은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처녀의 피로 목욕을 한 16세기 헝가리 귀족 여인의 이야기 <카운티스>다. 줄리 델피, 에단 호크, 라다 미첼 등이 출연하며 10월 말경부터 헝가리와 슬로바키아에서 촬영에 들어간다.

줄리 델피의 터닝포인트

<비포 선셋>

줄리 델피의 커리어는 <비포 선라이즈>를 만나며 달라진다. 보티첼리의 그림 속 여신을 연상시키는 유러피안 뷰티는 <비포 선라이즈>에서 새로운 매력을 발산하며 지구 반대편까지 이름을 알렸고, 그로부터 9년 뒤 리처드 링클레이터, 에단 호크와 <비포 선셋>의 공동각본가로 오스카 각본상 후보에 오르며 재능을 인정받는다. 사실 <비포 선라이즈> 때도 시나리오에 참여했지만, 당시엔 신인감독이었던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파워가 부족해서” 크레딧에 오르지 못했다고. 비록 크레딧에 오르진 못했지만 <비포 선라이즈>는 델피에게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그녀에게도 의미가 크다.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각본에 참여한 장면들에 호감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 뒤 <줄리 델피>(2003)라는 음반을 발표한 그녀는 <비포 선셋>의 O.S.T에 <A Waltz for a Night> 등 직접 작곡한 3곡으로 참여하며 연기 외 영역으로 발돋움했다.

로스앤젤레스의 파리지엔

할리우드가 초대한 프랑스 여배우는 많았다. 고작 한두편에 출연하고는 고국으로 돌아간 선례와 다르게 줄리 델피는 살아남았다. 1990년에 뉴욕으로 이주한 그녀는 “모든 곳이 영화와 연결돼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는 LA로 1992년 거주지를 옮긴다. 델피의 미국행은 감독이 되기 위한 일종의 투자였는데, 뉴욕주립대학의 필름스쿨에서 30편가량의 영화에 참여했고, 컬럼비아대학에서 시나리오를 공부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짐 자무시 등 미국 감독의 영화와 TV시리즈 <E.R.>에 출연한 것도 미국에 온 뒤의 일이다. 미국 활동이 프랑스에서의 커리어에 마이너스가 됐냐는 질문에 긍정하면서도 “정치적인 프랑스의 영화 제작 시스템이 끔찍”한 그녀는, 그래서 프랑스 영화계에 미련이 없다. 현재 그녀는 프랑스인인 동시에 미국인인 상태. 부시가 대통령이 됐기 때문에 미국에서 꼭 투표하고 싶다는 이 이중국적의 여인은 “나의 뿌리는 내 안에 있다”고 말하는 21세기의 유목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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