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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후면비사] 감독님이 하사한 이름 달아야 뜬다?
이영진 2007-08-09

1960년대 배우들 스타·극중 주인공 이름 등으로 예명 짓기 붐

여배우가 되려면 이렇게 하라! <영화잡지> 1964년 1월호 만평은 ‘여배우가 되는 열두 계단’을 소상히 적고 있다. 뭇 남성들의 탐욕과 뭇 여성들의 선망을 한몸에 받기 위한 자가(自家) 매니지먼트 공식 열두 가지. 일러준 대로 찬찬히 살펴보자. 학교는 반드시 중퇴한다→서투르게(라도) 유행을 따르고 이야기 끝마다 영화배우를 거론한다→무조건 정형수술을 해둔다→비록 촬영이 없더라도 ‘뷰우티 케이스’를 들고 충무로를 하루 종일 왕복한다→음성은 동시녹음을 할 수 없도록 쉬게 만든다→우선 배우의 가방모치로 들어간다→반드시 택시를 탄다. 하루에 두번 이상 옷을 갈아입는다. 또 돈이 없더라도 선글라스는 꼭 사고 언제든지 벗지 않는다→담배와 술과 댄스는 배워둔다→감독이 콘티를 짜는 호텔 옆방에 자리잡고 스탭들이 모일 때마다 미소를 잃지 않는다→개성을 인정받기 전까지는 무조건 노출증이라는 열병을 앓아야 한다→아낌없이 주련다라는 마음을 행동으로 암시해줄 수 있는 연기력이 필요하다→이렇게 해서 조금 유명해지면 반드시 스캔들을 만든다. 단, 동거 생활까지는 하되 절대로 결혼식을 올려선 안 된다.

부와 명예를 동시에 쥘 수 있다는데 어디 12계명뿐이겠는가. 1960년대 중반, 제작 붐으로 불타오르는 충무로를 향해 골드러시를 감행했던 배우 지망생들의 금언집엔 “촌스런 이름을 하루빨리 버릴 것”이라는 것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어떻게 부모가 물려준 성까지 갈아치울 수 있느냐”는 지탄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편으론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름 석자를 자신의 운명과 결부시키는” 풍속 또한 있었으니, 개명을 한다고 천벌받을 일은 아니었다. 이전까지는 제 손으로 이름을 고치거나 주로 성명철학자나 점집의 힘을 빌렸던 배우들이 주로 감독이나 제작자들로부터 예명을 받아들게 된 건 1960년대 들어서부터다. 신필름 소속 배우였던 강신영이 신상옥 감독의 성을 따서 신성일이 된 것이나, 이광수 원작의 <유정>에 출연하면서 김수용 감독으로부터 극중 주인공 이름을 고스란히 전해받은 남정임이 대표적인 케이스. 김수용 감독은 “배우 이름이 촌스러우면 아무래도 비즈니스에 지장이 있지. 사례비는 무슨. 내가 못 지어주는 경우에는 작명소에 가서 이름 바꾸라고 내가 돈을 주기도 했다니까”라고 전한다.

1960년대 한국영화는 익히 알려졌듯이 황금기 중의 정점이었다. 1962년을 기점으로 “해마다 관객이 2천만명씩 늘어났다”. 1968편에는 연간 총관객 수가 1억8천명을 넘어섰는데, 당시 3천만 인구라고 계산하면 국민 모두가 한해 동안 여섯번이나 극장 나들이를 했을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이른바 청춘물이 터져나오기 시작하면서 신파를 선호했던 고무신 관객을 젊은 관객이 압도하고 이른바 대형 스타들이 쏟아져나오던 1960년대. 신인배우들은 스타덤에 오른 선배 배우들의 이름을 따서 제 이름으로 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1967년 <춘향> 오디션에서 1725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주인공을 따낸 홍세미는 행사 주최자였던 세기상사의 ‘세’자에 김지미의 ‘미’자를 따랐고, 1970년부터 모습을 드러낸 정인식은 좀처럼 1인자의 자리를 내주지 않았던 신성일의 후광을 조금이라도 얻기 위해 가운뎃자만 바꿔 신영일로 활동했다. 영화연구가 정종화씨는 “스타들의 위세가 대단했던 시대였던 만큼 오디션 등을 주최한 제작사쪽에서도 신인배우들의 이름을 지을 때 유명 스타들의 이름을 곧잘 따왔다”고 말한다.

데뷔 당시 <나오미의 꿈>이라는 노래가 히트를 해서 이름을 바꾼 나오미, 조문진-정인엽-최하원-전우열 등 4명의 감독이 “공동으로 픽업해서” 각 감독의 이름에서 한자씩 따온 조인하 등 작명 스토리가 어디 한둘이랴. 배우들의 수만큼이나 이름의 사연도 셀 수 없이 많다. “호적에 오른 본명까지 예명으로 바꾸려고 했던” 여배우도 있었다고 한다. 정진우 감독으로부터 신숙이라는 새 이름을 얻어 데뷔한 이승희는 새 이름으로 그닥 재미를 못 보자 이후 <20인의 여도적>(1971)에 출연하면서 감독이자 제작자였던 이지룡씨의 뜻을 따라 다시 이승희가 되기도 했다(한국영상자료원 데이터베이스에서는 이승희와 신숙이라는 배우는 서로 다른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큰 뜻 품고 새 이름대로 승승장구하면 좋으련만, 경쟁자가 많아질수록 바늘구멍은 더 좁아질 수밖에 없다. “온갖 여러 가지 예명으로 영화계에 나오는 신인들은 이름 자체에서 인기를 얻으려는 심산보다 연기를 내세우는 연기인이 되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류의 기사야 단물 빼먹고 훈계하는 식이고, 그보다 이름부터 대중의 관심을 끌어보겠다는 당시 초보 매니지먼트 기술이 더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