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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우리는 나라없는 백성인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억류된 한국인 인질들이 2명이나 죽어나가고 있는 사이 한국 정부는 이렇다 할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좌불안석하고 있다. 이 엉거주춤은 그동안도 많이 봐왔던 춤(?)이라 낯설지 않다. 김선일씨 때도 그랬고, 효순이 미선이 때도 그랬다. 그뿐만이 아니다. 재미동포의 권익에도 그렇고, 재일동포에 대한 처우문제에도 한국 정부는 속수무책이다. 이렇게 자국민 보호에 무대책, 무정책인 나라가 또 있을까 싶다. 이런 무대책이다 보니 한민족 디아스포라에 대해서는 말하기도 싫다. 한국에서 시민/국민/인민들은 세금내는 기계들에 불과하다. 정부는 그 세금을 걷어다가 재벌들만 살찌우고, 인민들은 미군 장갑차에, 탈레반의 총알에 픽픽, 쓰러지고 짓밟힌다. 그러고도 일언반구 찍소리도 못한다. 한심하다.

한국 인민을 세금 잘 내는 ‘봉’으로 보는 건 정부뿐만이 아니다. 한국에서 자국민을 ‘봉’으로 보는 또 다른 집단들이 있다. 재벌들이다. 70년대 수출주도형 개발정책을 펼치면서 박정희는 제품의 경쟁력을 가격에서 찾았다. 싸게 수출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손해는 내수시장에서 메운다는 게 70년대 수출주도형 경제개발의 실체였다. 당연히 외국에는 싸게 팔고 국내에서는 비싸게 팔아 소비자를 봉으로 삼고, 거기다 노동자들의 임금까지 착취해가며 부를 축적한 것이 오늘날 한국의 재벌들이다. 말하자면 한국의 기업들은 독재라는 인큐베이터 속에서 키워진 온실의 화초 같은 존재들이다. 이 화초들이 전면적인 시장개방을 맞았다. 이제 국내 소비자들도 같은 값의, 더 좋은 외국 제품들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다. 애국심에 호소하는 것도 이제는 통하지 않는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자동차다. 자동차는 4대 중 3대를 수출할 정도로 연간 수출액, 무역수지 흑자, 일자리 창출 등이 모두 1위를 차지할 정도로 핵심적인 산업이 되었다. 그러나 내수시장은 매출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그러나 판매대수가 훨씬 적은 국내에서 대부분의 생산업체가 괄목할 만한 수익을 내고 있으니 여전히 국내 소비자는 ‘봉’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같은 자동차를 미국에서 사서 수입해 오는 것이 한국에서 사는 것보다 더 싸다고 하니, 무역수지 적자를 위해서 국내 소비자가 지불하는 돈은 실로 엄청난 액수에 이를 것이다. 그러니까 소비자 입장에서 보면 기업이 무역해서 본 손해를 우리가 벌충해줬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우리(소비자)는 늘 기업들에 왕이 아니라 ‘호구’ 내지 ‘봉’이 되어왔다. 뭐 새로운 얘기도 아니다.

또 한 가지 외국 출장을 자주 다니면서 느낀 건데 우리가 쓰는 휴대폰 문제다. 나는 늘 해외 로밍을 하려면 내 고물 휴대폰으로는 할 수 없다고 해서 다른 휴대폰으로 바꿔 간다. 단말기가 낡고 고물이어도 거기에 모든 전화번호들이 있고, 심지어는 구상 중인 시의 초고도 메모형태로 남아 있어서 단말기 바꾸기가 쉽지 않다. 요즘엔 쉽게 되지만 전에 단말기를 바꾸다가 모든 정보를 잃어버려서 애가 받친 기억 때문에 더 쉽지 않은가보다. 그런데 외국에는 이동전화가 단말기는 별 의미가 없었다. 그저 안에 있는 카드를 뽑아서 다른 단말기에 넣으면 모든 것이 그대로 아무렇지도 않게 작동되었다. 항상 단말기가 모든 정보였던 나에게 그것은 충격이었다. 이 조그만 카드 안에 모든 이용자의 정보가 들어 있는 방식을 GSM방식이라고 한다. 이 유럽통신방식(GSM)의 소비자들은 여행을 할 때 단말기가 아니라 작은 카드 하나만 있으면 그 나라에서 전화기를 빌려 자기 것처럼 쓸 수 있고, 보안성도 한국이 채택하고 있는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방식보다 뛰어나 전자상거래 등에서도 유용하게 활용된다. 한국은 그동안 세계 최초의 CDMA 상용 국가라는 명목하에 사용자 인식을 위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개별 휴대전화에 고유번호를 부여하고 내부에 이를 아예 내장해 번호이동이나 다른 휴대전화 단말기를 바꿀 경우 매번 이동통신사 대리점에 가서 조치를 받아야 했다. 문제는 한국은 왜 이런 불편한 방식을 택했느냐는 것이다. 여기에는 분명 또 정권과 체신부와 기타 이익집단들의 첨예한 이해관계가 성립했을 것이다. 한국인은 외국에 나가든 자국에 있든 국제 관계의 ‘봉’이고, 한국 소비자들은 국내 기업의 ‘봉’이다. 진정 우리는 아직도 나라없는 인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