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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 대한 사려깊은 시선, <사과>

EBS 9월9일 오후 2시20분

<사과>는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딸이자, <칠판>의 감독인 사미라 마흐말바프가 18살 때 만든 데뷔작이다. 이 영화가 데뷔작이라는 사실도 놀랍지만, 십대 소녀의 손에서 탄생한 영화의 성숙한 정서 또한 놀라울 따름이다. 1998년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대되었던 <사과>는 이란에서 실제 일어났던 사건을 바탕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사건 자체가 이미 영화보다 극적인 경우 문제는 사건을 얼마나 극적으로 재구성할 것인지가 아니라, 그 사건을 영화적으로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놓여 있다. 이를테면 사건을 다시 한번 직설적으로 반복하는 대신, 사건을 재구성 혹은 재해석함으로써 그 틈을 읽고 형상화하는 것. 사미라 마흐말바프의 시선에는 치밀한 기교는 없지만, 대상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영화 끝까지 지키고자 하는 신중함이 있다.

노인은 눈먼 아내와 어린 쌍둥이 딸들과 살고 있다. 그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돈을 벌러 밖에 나가야 할 때마다 아내와 딸들이 나가지 못하도록 문을 걸어 잠근다. 아이들은 세상과 차단되어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지 못한다. 이웃들의 신고로 사회사업가들이 찾아와 아이들을 데려가고 노인은 더이상 아내와 딸들을 가두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다. 그러나 그가 약속을 어기자, 복지부 직원이 찾아와 딸들을 풀어주고 노인을 가둔다. 세상 밖으로 나온 두 소녀는 첫걸음마를 떼듯, 또래들과 어울리는 법을 익혀나간다.

아마도 현실에서는 인권의 이름으로 노인을 지탄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미라 마흐말바프가 눈길을 돌리는 지점은 갇힌 아이들이 아니라, 이 가족을 벼랑 끝으로 내몬 사회다. 카메라는 오랜 시간 고립되어 스스로를 표현조차 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동시에, 노인의 눈물 섞인 절박한 변명에도 귀를 기울인다. 가부장적인 이슬람 문화 속에서 자기 한몸 지탱하기 힘든 노쇠한 남자가 이 궁핍한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어떤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영화는 희망의 가녀린 줄기를 놓지 않는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카메라가 철창 안에서 손을 뻗어 철창 밖의 화분에 물을 주는 소녀들과 노인을 담을 때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 너무도 자연스럽게 또 다른 생명을 보듬는 숭고한 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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