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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봅시다] 에이젠슈테인의 나라, 블록버스터의 날개를 달다
홍상유 2007-09-11

표도르 본다르추크의 <제9중대>와 러시아 블록버스터의 세계

침체기에 빠졌던 러시아 영화산업이 재생을 거쳐 날개를 달고 솟아오르고 있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후예들이 ‘러시아 블록버스터’라는 신종 영화를 제조했고 목마른 관객은 멀티플렉스를 가득 채운다. 2005년 러시아 최고 흥행작 <제9중대>의 개봉에 앞서 러시아 블록버스터와 표도르 본다르추크 감독에 대해 알아본다.

<제9중대>

1. 러시아 영화산업

소련 붕괴 전 러시아 영화산업은 정부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소설 각색이 대부분이었던 볼셰비키 혁명 전 영화는 차르의 허락을 받아야 했고 혁명 뒤 1920년대 에이젠슈테인과 도브첸코는 제한된 자유 속에서도 위대한 영화들을 빚어냈다. 당은 영화가 얼마나 파급력이 큰 선전 방법인지 일찍이 인지하고 있었다. 1960년대에 타르코프스키가 등장한다. 1980년대 중반 페레스트로이카가 영화계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며 소련 영화제작자연합은 개별 조합으로 나뉜다. 소련 붕괴 뒤 정부 보조금이 하루아침에 사라졌고 창의성이나 장인정신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불황’이라기보다 ‘부재’라는 단어가 어울릴 정도로 산업이 시들었다. 국영 스튜디오 4곳 중 가장 규모가 큰 모스필름은 1970년대만 해도 1년에 50편 이상 제작하던 곳이었지만 1997년에는 3편의 영화만 만들어질 정도였다. 극장들이 창고나 가구전문점, 자동차 판매전시장 등으로 바뀌었고 1200만명이 사는 수도 모스크바는 한때 10개의 스크린밖에 없을 정도로 사람들은 영화를 외면했다.

2. 러시아 블록버스터

2002년 정부는 보조금을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2004년 국영방송 채널원이 제작하고 광고한 티무어 베크맘베토프의 <나이트 워치>가 개봉했다. 이 영화는 할리우드영화를 누른 첫 ‘러시아 블록버스터’로 이름을 남기며 러시아 박스오피스 기록을 갈아치웠다. 자국에서만 1630만달러란 성적을 올리며 <나이트 워치>는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과거 러시아영화 최고의 흥행작 성적은 300만달러였다). 2005년 정부의 보조금은 700만달러에 달했지만 러시아 영화산업은 벌써 이익을 내고 있었다. 2005년 9월 개봉한 <제9중대>는 러시아 내에서만 2500만달러를 벌어들였다. <나이트 워치>의 속편 <데이 워치>는 2006년 1월1일 개봉하여 3500만달러를 벌어들이며 지금까지도 러시아영화 최고 흥행작의 위치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5% 남짓 되던 자국영화 점유율이 3년 만에 30%까지 올라가는 기염을 토한 러시아 영화산업의 기세는 등등하다. 멀티플렉스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어 전문가들은 2010년 모스크바에만 3천개의 극장이 들어찰 것으로 추측한다. 2007년 러시아영화 제작편수는 150여편으로, 러시아 문화영화위원회는 곧 1년에 200여편씩 제작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3. 세르게이 본다르추크

<제9중대> 마지막에는 영화를 아버지께 헌정한다는 글이 뜬다. 표도르 본다르추크 감독의 아버지는 전후 위대한 영화감독들 중 하나인 세르게이 본다르추크다. 한 평론가는 규모가 큰 액션 시퀀스를 여유롭게 연출하는 능력이나 전쟁이라는 소재 선택에서 부자가 닮은 점을 주목했다. 실제로 표도르 본다르추크는 ‘아버지가 나의 가장 훌륭한 선생님’이라고 말한다.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고 체호프와 톨스토이의 열렬한 독자였던 세르게이 본다르추크는 적군(赤軍)으로 2차 세계대전에서 4년 복무했다. 그는 1946년 러시아국립영화대학(VGIK)에 입학하여 2년 뒤 배우로 졸업했다. 1948년 배우로 데뷔한 뒤 당시 최연소 나이에 소련 국민 예술가 칭호를 받았으며, 1959년 2차 세계대전 영화 <인간의 운명>으로 감독 데뷔했다. 1960년 그는 이 영화로 레닌상을 수상했다. 7년에 거쳐 <전쟁과 평화>를 연출한 세르게이 본다르추크는 1980년대 말 유작인 <고요한 돈강> 제작을 시작했지만 자금이 부족하여 이탈리아까지 자금을 찾아 달려갔다. 돈을 댄 이탈리아 제작자가 최종 편집 전 파산하여 감독의 마지막 2년 동안 소유권 분쟁이 계속되었던 <고요한 돈강>의 저작권은 2004년 정부의 도움으로 러시아로 돌아왔다. 표도르 본다르추크는 <제9중대>를 마친 뒤 <고요한 돈강>을 미니시리즈로 재가공하는 임무를 맡았다. 아들의 손길을 거친 아버지의 유작은 2006년 드디어 러시아의 <채널원>에서 방영되었다.

4. 표도르 본다르추크

1967년 모스크바 태생인 표도르 본다르추크는 90년대 많은 러시아 감독처럼 뮤직비디오와 광고를 연출했다. 러시아국립영화대학을 1991년 졸업한 뒤 그가 연출한 슈퍼맥스사 광고가 93년 러시아 최고 광고상을 받는 등 성과를 냈다. 그는 러시아 팝뮤직비디오 현장에서 성공, MTV 유럽과 협약을 맺는다. 본다르추크는 VJ로도 활동했고, 지상파 TV에서 영화에 대한 인기 쇼 MC를 맡기도 했으며, TEFI상(러시아의 에미상)을 수상했다. TV에서 연기 경험을 쌓았던 표도르 본다르추크는 출연하기로 한 배우가 나올 수 없게 되자 직접 <제9중대>에 출연하기도 했다. <제9중대>는 개봉하자마자 8일 만에 1천만달러 이상을 획득하며 손익분기점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감독은 <제9중대>에 대해 “이 영화는 나의 세대에 관한 것이다. (영화에 나오는) 이 청년들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다. 우리는 아직도 위대한 나라다”라고 말한다. 그는 소련?? 공상과학소설을 각색한 2부작 <The Inhabited Island> 촬영을 2월에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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