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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주의 거장, 누아르의 정수를 만들다
김민경 2007-09-12

프리츠 랑의 아메리카 특별전, 9월13일부터 30일까지 열려

프리츠 랑의 영화를 볼 때마다 나는, (그의 작품 중 가장 별로인 영화를 볼 때조차도) 분명 뭔가 배우게 된다. 영화란 매체의 메커니즘을 그만큼 완벽하게 이해하는 감독은 없었다. 영화연출에 관심있는 자라면 그의 작품은 반드시 공부해야 한다.” ‘랑으로부터 배우기’라는 글에서 마틴 스코시즈가 프리츠 랑에게 바친 찬사다. 랑은 독일 표현주의의 작가적 유산을 계승한 무성영화 걸작 <메트로폴리스> <M> 등으로 일찍이 거장의 반열에 오른 감독이지만, 나치의 마수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뒤 만든 장르영화들은 프랑스 평단의 필름누아르 비평이 나오기 전까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 프리츠 랑의 할리우드 시절(1935∼56) 작품들을 감상할 기회가 찾아왔다. 9월13일부터 30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프리츠 랑의 아메리카 특별전’은 그가 미국 체류 시절 만든 23편의 영화 중 10편을 소개한다. 강렬한 비주얼에 고도의 추상성을 녹여넣은 독일 시절의 무성영화 걸작과 달리 형사물부터 웨스턴, 전쟁영화까지 다양한 장르를 종횡하는 이 시기의 작품들은 독일 시절보다 훨씬 잔혹하고 직설적인 표현과 단순명료한 연출로 도시 문명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비전을 전달한다. 막 데뷔한 앨프리드 히치콕이 “영국의 프리츠 랑”으로 칭해졌단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독일 시절부터 할리우드 장르감독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그가 미국에서 어떤 작품세계를 펼쳤는지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감상 포인트가 될 것이다.

<한번뿐인 삶> You Only Live Once 프리츠 랑이 미국에 건너와 찍은 두 번째 영화. 한때 미국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악명 높은 무장강도 보니와 클라이드의 실화를 처음으로 영화화한 작품으로, 이후 같은 인물을 소재로 한 니콜라스 레이의 <? >, 아서 펜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등에 영향을 끼쳤다. 3년 만에 출소한 에디는 사랑하는 조앤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살아보려 하지만 세상의 편견은 냉혹하기만 하다. 전과 탓에 짓지도 않은 죄까지 억울하게 뒤집어쓴 에디는 일단 자수하라는 조앤의 순진한 조언을 따랐다가 사형수가 되고, 결국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스스로 나선 두 사람은 도망자가 되어 점점 더 큰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한번뿐인 삶>은 범죄의 근원을 개인의 내면의 결함이 아닌 미국사회의 비인간성과 불관용을 통해 파헤친 랑의 할리우드 초기작으로, 불안과 긴장을 능란하게 자아내는 충격적인 음향효과와 편집이 돋보인다. 당시로선 강도 높은 폭력 묘사로 인해 15분가량 삭제된 상태로 개봉했다.

<빅 히트> The Big Heat <빅 히트>는 최초의 필름누아르영화 중 하나로 손꼽히는 범죄영화의 고전으로, ‘누아르 사상 가장 충격적인 폭력’장면 덕에 잔혹누아르의 대명사로 가장 먼저 꼽히는 랑의 할리우드 시기 대표작이다. 한 베테랑 경찰의 자살사건에 의구심은 품은 강직한 형사 베니언은 상부의 압박을 무릅쓰고 진상 조사에 나선다. 그에게 이 자살의 진실을 규명해달라고 부탁한 술집 작부 루시는 이내 변사체로 발견되고, 던칸의 미망인과 정치인의 스캔들을 조사하며 강성 수사를 밀어붙인 베니언의 신변에도 위협이 닥쳐온다. 상부의 압박에 굴하지 않는 베니언은 정치인들의 해결사 노릇을 하는 빈스 스톤의 애인인 팜므파탈 데비를 만나 실마리를 얻지만 비극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 영화를 ‘100편의 위대한 영화’로 꼽은 로저 에버트의 지적대로 언뜻 성공적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듯한 영화의 외피 아래에 한 형사의 영웅적 행동이 의도치 않은 더 많은 비극을 낳는다는 아이러니가 겹겹이 숨겨져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불필요한 장치 하나없는 명쾌한 진행으로 오히려 더 묵직한 충격을 전하는 <빅 히트>는 모든 누아르영화의 전범으로 평가받고 있다.

<블루 가디니아> The Blue Gardenia <이유 없는 의심> <도시가 잠든 사이에>와 함께 프리츠 랑의 ‘언론 누아르 3부작’으로 불리는 작품. 살인과 범죄를 시민들의 흥미로운 오락거리로 소비시키는 언론매체의 존재는 랑의 작품에서 여러 차례 등장하는 테마다. 실연의 상처를 안은 전화 교환원 노라는 이국적인 레스토랑 블루 가디니아에서 화가 해리 프레블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만취한 채 그의 아파트를 찾아갔다가 다음날 자기 집에서 깨어난 노라는 신문에서 프레블이 살해당했다는 뉴스를 듣고 경악한다. 현장엔 그녀의 옷에 달려 있던 블루 가디니아 꽃이 떨어져 있지만 정작 그녀에겐 아무 기억도 남아 있지 않다. 유명한 신문 편집자 케이시 메이요에 의해 사건은 ‘미모의 살인자 블루 가디니아’라는 헤드라인을 달고 국민적 관심사로 커져만 가고, 불안에 빠진 노라는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행동에 나선다. 미국 저널리즘이 범죄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내세워 범죄를 상업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랑의 문제의식이 돋보이는 작품. 피터 보그다노비치는 이 영화를 가리켜 “미국인의 삶 중에서도 가장 치명적인 단면”을 다뤘다고 평한 바 있다.

<문플릿> Moonfleet 할리우드로 무대를 옮긴 프리츠 랑은 범죄누아르영화를 다수 만들었지만 <문플릿> 같은 모험 활극에서도 장기를 발휘했다. 1757년 영국, 어머니를 잃은 어린 소년 존은 유언에 따라 밀수와 범죄가 들끓는 수상한 마을 문플릿에 혈혈단신 들어온다. 존은 어머니의 친구 제레미 폭스를 찾아가 몸을 의탁하려 하지만, 무엇에도 얽매이기 싫어하는 괴팍한 신사 제레미는 그를 냉대한다. 꿋꿋이 문플릿에 적응해가던 존은 발을 헛디뎌 빠진 교회 지하 납골당에서 밀수단의 비밀 아지트를 발견하고, 이곳에서 전설적인 밀수범이 숨겨둔 보물의 위치를 가리키는 암호문을 손에 넣는다. 서로의 필요에 의해 존과 제레미 사이에 묘한 파트너십이 성립하고, 밀수단이 연계된 위험한 보물찾기 게임이 시작된다. 한폭의 음산한 동화 화첩을 보는 듯한 세트와 조명 사용도 인상적이지만, 아이를 싫어하고 도덕과 규범을 무시하는 제레미 폭스의 ‘쿨’한 캐릭터 묘사도 흥미롭다. 어둡고 기괴한 고딕 동화 같은 시각적 이미지와 결합한 독특한 모험극.

<오명의 목장> Rancho Notorious 누아르영화에 비해 그다지 호평받지 못한 랑의 1952년작 웨스턴. 1870년대 미국 와이오밍의 황야를 배경으로 한 <오명의 목장>은 랑이 제작사 RKO에서 만든 영화로 당시 대표로 있던 하워드 휴스와의 숱한 갈등 끝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서부에 대한 그의 동경과 낭만이 담겨 있다. 강도한테 약혼녀를 잃고 복수심에 불타는 번 해스켈은 범인을 찾아 헤매다 범죄자들의 도피처로 유명한 ‘척 어 럭’이라는 목장에 대한 정보를 듣는다. 번은 범인이 그곳에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에 탈옥수가 되어 목장으로 찾아가고, 은퇴한 클럽의 가수 출신인 목장 여주인 알타 킨은 그를 거두어주는 대신 ‘어떠한 질문도 금지’라는 목장의 규칙을 지키라고 명령한다. 원수를 찾기 위해 목장에 모인 범죄자들의 은행털이 계획에 동참한 번은 어느덧 알타 킨에게 사랑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고 당황한다. 중년의 마들렌 디트리히가 범죄자들을 다스리는 매력적인 여주인 알타 킨으로 출연해 화제가 됐다.

<창가의 여인> The Woman in the Window 모험도 열정도 없는 중년의 삶에 회의하던 범죄심리학 교수 리처드 원리의 일상에 예상치 못한 위기가 닥쳐온다. 거리의 상점에 걸린 아름다운 초상화 속 여인에게 매료된 리처드는 놀랍게도 그 앞에서 그림 속의 여인 앨리스를 만난다. 어딘가 위험한 매력을 발산하는 앨리스와의 즐거운 시간도 잠시, 질투에 미쳐 덤벼드는 그녀의 옛 애인을 실수로 살해하면서 리처드의 설렘은 악몽으로 돌변한다. 게다가 목격자를 자청하는 제3의 인물이 앨리스를 협박하면서 두 사람은 또 다른 살인을 모의하게 된다. 프리츠 랑의 다른 작품처럼 <창가의 여인>도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우발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며 위기에 빠지는 인물들의 심리를 당대의 사회상 속에서 그려낸다. 끝을 향해갈수록 긴박해지는 호흡과 결말의 반전은 이후의 범죄스릴러와 누아르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인상 깊은 연기를 선보인 에드워드 G. 로빈슨과 조앤 베넷은 이후 프리츠 랑의 걸작 누아르 중 하나로 손꼽히는 <진홍의 거리>에서도 호흡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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