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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없이, 미소가 싹트다
2001-10-31

<집으로…> 촬영현장

작은 미소가 가슴속에 피어난다. 상우는 두 손가락을 이마 옆에 대며 ‘조금만’이란 손짓을 할머니에게 보내고 할머니는 상우처럼 손가락을 만들며 ‘짧게?’라고 손짓한다. 말못하는 할머니가 외손자 상우의 머리를 잘라주는 장면이다. 상우의 머리가 잠시 뒤 어떻게 되었을지는 불보듯 뻔하다.

산이 8가구 마을 전체를 폭 싸안은 충북 영동군 산촌면의 한 산골마을이 벌써 5개월째 들썩이고 있다. 이정향 감독의 두 번째 영화 <집으로…>가 촬영중이기 때문이다.

“할머니, 손가락을 이렇게 만들어주세요.” 이정향 감독은 직접 시범을 보이지만 할머니의 손가락은 생각대로 잘 움직여주지 않는다. 77살의 김을분 할머니는 굽은 허리가 아프셔도 열심히 반복해서 연기를 하신다. 9살의 유승호도 할머니에 맞추어 열심히 휘파람을 불고 거울을 이리저리 돌리며 연기를 한다. 드디어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고 쉴 틈도 없이 카메라 앵글을 바꿔가며 머리 자르는 신을 찍는다. 어느덧 해는 서산으로 꼴딱 넘어가고 잠을 자다 깬 상우가 이마 위로 깡총 짧아진 머리를 보고 길길이 날뛰는 장면은 결국 내일 촬영하기로 한다. 할머니도 상우(유승호)도 지친 모습이다. 할머니는 “재미있을 만하니 끝난다”며 다 떠나면 서운해서 걱정이시란다. 힘드시지 않았냐고 물으니 “틀니를 빼고 있어야 해서…. 비맞으며 하루 종일 촬영하던 날은 감독을 때려주고 싶었어”라며 웃으신다.

아들을 혼자 키우던 젊은 엄마가 생활고로 떠나온 지 10년이 넘은 고향의 어머니에게 일곱살난 아들을 잠깐 맡기게 되고 구질구질한 시골에서 언어장애인 할머니와 한달간 생활하며 둘 사이의 뭔가가 변하게 된다. 결국 아이와 엄마는 그들의 ‘집으로’, 할머니도 자기의 ‘집으로’ 돌아간다. 주인공이 여자이고 작은 목소리로 얘기한다는 점에서 전작인 <미술관 옆 동물원>과 그 맥이 닿아 있는 영화다.

상우 역의 유승호군과 엄마 역을 빼면 모두 현지에서 캐스팅한 초짜 배우들(?)이 만들어낼 <집으로…>는 13억원 저예산영화로 11월 초에 촬영을 마치고 내년 2월 개봉할 예정이다. 호두와 감 농사를 마무리하고 있는 마을 주민들은 관광버스로 상경해 <집으로…>를 볼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충북 영동=사진·글 오계옥

이정향 감독 인터뷰

“할머니는 영화찍고, 스탭은 농사짓고”

3년 만의 두 번째 작품인데 이 영화는 어떻게 만들게 되었나.

지난해 여름 돌아가시기 전까지 외할머니와 쭉 함께 살았는데 각별히 친했고 우리 둘만의 뭔가가 있었다. 언젠가 할머니와 내 얘기가 녹아 있는 영화를 만들어야지 맘먹고 있다가 1997년 초 <미술관 옆 동물원> 촬영하기 전에 시나리오를 썼다. 벌써 4년 전이라 시대에 뒤처진 물건들이 좀 나온다. (웃음) 영화 속 인물에 내 외할머니와 내 캐릭터가 들어 있다.

극중 할머니가 언어장애인데 혹시 연기가 안 될 것 같아 그렇게 설정했나.

아니다. 할머니는 총기가 뛰어나시고 연기도 잘하신다. NG가 나면 소품을 원래대로 해놓을 정도로 영화를 잘 이해하신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사투리 녹취를 못해 고민하다 문득 자연이 말이 없듯이 할머니가 말을 못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했다. 물론 대사가 없으니 할머니 연기 지도하기가 편하기는 했다.

이야기 내용도 그렇고 스타도 없는데 흥행에 대한 부담은 없나.

나도 걱정이긴 하다. 기본적으로 완성도가 높으면 관객이 온다고 생각하지만 요즘 현실이 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런 영화하겠다고 나서준 튜브픽처스가 너무 고맙다.

듣자하니 신기(神氣)가 있다던데 무슨 말인가.

(웃음)이번 영화는 장소와 주연역할의 할머니 캐스팅이 중요한데 산 속 외딴 시골집과 그런 현지 장소에서 딱 맞아떨어지는 할머니를 찾기가 힘들었다. 연출팀이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는데 어느날 왠지 이곳 영동으로 오고 싶었다. 몇몇 후보지 중에서 이곳으로 결정을 하고 또 할머니 캐스팅으로 영동을 헤매고 다니다 길에서 우연히 김을분 할머니를 만났는데 바로 저분이라는 느낌이 들어 어렵게 캐스팅을 하게 되었다. 그걸 보고 스탭들이 지어낸 얘기인 것 같다. (웃음)

산 속 깊은 곳에서 촬영하느라 힘들진 않은지.

원래 일하는 것을 천성적으로 싫어하는데 재미있게 일했다. 공기도 좋고 동네 주민들이 관심이 많아 촬영장에 매일 구경오신다. 할머니 건강이 염려돼서 할머니가 농사지으시는 포도밭과 호두밭을 우리 스탭들이 농사지어 호두는 15가마나 수확했다. 다들 재미있어했다. 아마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