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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단편 18] 이정행 감독의 <점>

거대한 점이 온몸을 집어삼킬 때

그 여자는 투명인간이다. 부풀린 환대와 호들갑이 오가는 술자리에서조차 사람들은 그녀를 보지도, 듣지도 않는다.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한 미약한 몸짓. 그녀는 입가에 작은 점을 하나 그려 넣는다. 진정한 악몽은 그때부터 시작이다. 바이러스가 침투하듯 스멀스멀 영역을 넓혀가던 점들은 어느새 온몸을 집어삼키고, 건조하던 일상은 끈적한 환각의 미로로 탈바꿈한다. 소외와 고립을 공포의 키워드로 사용하는 것은 낯설지 않지만, 점이라는 범상한 소재가 거대한 악몽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시각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바짝 소름을 돋우기에 모자람이 없다. 공포를 촉발하고 그것을 확장시키는 감각과 리듬이 돋보이는 <>은 이정행씨의 첫 번째 연출작이다.

“어느 날 몸을 보니 전에 없던 점이 생겼더라. 이 점이 늘어나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해본 것이 발상의 출발이었다. 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인간관계가 넓어졌지만, 대부분 형식적인 것에 그치는 것 같다는 회의도 있었고. 그런 생각들로부터 영화가 시작됐다.”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던 이정행씨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것은 특이하게도 군대에 있을 때였다. “원래 개인적인 성향이 강했는데, 집단 생활을 하다보니 사람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됐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데 영화가 가장 효과적인 매체라는 생각이 들더라.” 일단은 함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동지들을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제대 뒤 독립영화 촬영장에서 연출부로 뛰며 현장의 감을 습득한 다음에는 한겨레영화제작학교에 들어갔다. <>은 바로 그 배움의 와중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눈에 띄는 소품들을 비롯해 시각적으로 매끈히 다듬어진 완성도에 반해 투입된 제작비는 100만원 안쪽. 악착과 발품의 미덕이 일궈낸 결과다. “주인공 방의 그림들은 내가 학교 다니며 만든 작품을 골라서 붙인 거고, 오피스텔은 지인을 통해 섭외했다. 지하철신은 게릴라 촬영을 했고, 편의점은 집 앞의 편의점에 잘 이야기해 촬영한 거다. 아, 이렇게 말하면 너무 습작 같나? (웃음)”

이정행 감독

협업의 중요성과 어려움을 동시에 절감하게 해준 첫 영화를 마친 뒤,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인디밴드 ‘보드카레인’의 뮤직비디오를 2편 연출하게 됐고, 그중 26만원이라는 초저예산으로 탄생시킨 첫 뮤직비디오 <Night Flight>는 얼마 전 홍대 상상마당 개관 영화제에서 수상해 상영의 기회를 잡기도 했다. “초등학교 사생대회 이후 상을 받아본 적이 없는데, 영화를 시작한 이후에 일이 잘 풀리는 것 같다. (웃음)” 이제 졸업을 눈앞에 두고 있는 이정행씨의 단기 목표는 대학원 혹은 영화 아카데미에 들어가 좀더 전문적인 배움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영화감독, 그중에서도 공포영화 감독이다. “공포영화는 보통 도식적으로 흐르기 쉽지 않나. 나는 장르적 관습에서 벗어난, 지적인 공포영화를 만들고 싶다. 내가 특히 좋아하는 것은 데이비드 린치의 작품이다. 보고 나서도 오래도록 잔상이 남고, 인간의 어두운 면을 되새기게 만드는 불편한 영화가 좋다.” 이정행. 이름 석자를 이야기하면, 그 감독은 이런 사람이야, 한줄의 말로 요약될 수 있는 고유의 색깔을 지닌 작가. 이제 막 스타트라인에 선 신인감독이 그리는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