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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후면비사] 차를 보면 배우의 인기가 보인다?
이영진 2007-11-01

1970년 인기 배우들 고급 승용차 뽐내기 경쟁

“중견배우 OOO는 이번에 차를 팔았다면서? 영화제작에 뛰어들었다가 쫄딱 망했으니 그럴 법도 하지. 고급 세단 뽑았다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말야. 이제 인기도 시들하고 OOO도 호시절은 다 갔구먼.” “근데 말야. 신인배우 XXX는 출연료도 변변찮은데 이번에 외제차를 샀다면서. 어찌 된 일이야?” “맹추. 그걸 몰라. 재벌 △△△가 챙겨준 거라잖아. 그러니까 세상이 요 모양이지. 이번에 ◇◇영화사에서 신인배우 오디션을 열었는데 말야. 별로 신통치도 않는 나체사진까지 동봉한 처자도 있다더구먼.” “청운의 꿈인지 허영의 거품인지 모르겠구먼.” “영화사들마다 언젠가 자가용 타고 돌아오겠다며 집 뛰쳐나간 딸을 찾겠다고 헤매는 부모들 천지라잖아. 알맹이보다 껍데기가 중요한 시절이라니까, 지금은.”

‘앞공론 뒷공론’이니 ‘동서남북’이니 하는 1970년의 각종 영화잡지 뒷담화 꼭지들을 뒤적이다 보면 영화배우에 대한 동경이 여전했음을 알 수 있다. 울면 울고 웃기면 웃던 고무신 관객이 안방의 TV 앞에 엉덩이를 붙이는 배신을 때렸지만, 여전히 은막의 스타들은 “뒷모습은 대역을 쓰며” 한해 30여편의 영화에 출연할 수 있었고, 매년 연말에는 고액소득자 랭킹을 다투기 바빴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자동차야말로 당시 경제적 출세와 사회적 인정의 가장 확실한 증표였다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자가용 타고 친정 가세>(최희준, 1973)라는 노래가 나왔을 것인가.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고, ‘마이카’족들이 레저를 만끽하기 시작한 1970년. 실로 마이카 열풍은 대단했는데, 20년 전만 하더라도 불과 200여대에 불과했던 승용차는 1970년대 중반에 이르면 무려 3만여대에 다다를 정도였다.

이러했으니 고급 ‘쎄단’을 몰고 다니는 영화배우들이 더더욱 선망의 대상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인기전쟁에 모습을 나타낸 자동차 경쟁’(<영화잡지>, 1970년 8월호)이라는 기사는 “스타 남정임, 문희, 윤정희양의 자가용은 어떤 것이며 차와 얽힌 사연은 어떤 것일까”라는 궁금증을 부제로 달았는데, A급 스타들이 몰고 다니는 자동차를 생물체라도 되는 양 극진히 소개한 내용이 흥미롭다. 빨간 코티나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제 집 침실만큼이나 안락하다는 남정임, 안전은 둘째치고 스피드를 즐기는 크라운의 주인 문희, 자신의 애마 포드로 팬들의 등굣길을 도왔다는 윤정희의 에피소드를 스타의 옆좌석에 바짝 앉아 직접 제 눈으로 본 것인 양 지극히 묘사하는데, 남편은 없어도 자동차 없이는 못살겠다는 스타들의 자동차 사랑을 들려주겠다고 안간힘이다.

빅스타라고 처음부터 고급 자동차를 굴릴 수 있었던 건 아니다. “1급 배우라고 뭐 다른가. 196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다 ‘찝차’지. 잘나가는 여배우들도 다 미8군에서 불하받은 차를 타고 다녔다고.” 한 원로 영화인의 구술이다. 그에 따르면, “찝차도 아무나 못 탔다”. 액션배우는 안 되고, 멜로배우들만 탈 수 있었다. 김지미의 경우 1960년 전후에 외제차 시보레를 구입했으나 “통관 당시 말썽이 일어서” 압수당하기까지 했다. 배우들이 앞다투어 승용차 구입 경쟁에 나섰던 건 1962년에 이른바 ‘5·8 조치’가 해제된 이후다. “심각한 유류부족” 사태를 맞게 된 정부는 1957년 “자동차의 증가를 억제하기 위해 신규허가를 금지”했는데, 5년 뒤 새나라자동차가 만들어지자 곧 폐지했다. 이에 영화배우들도 승용차 구입에 나서게 됐는데, 최은희는 포드, 도금봉은 닷지, 엄앵란은 시보레 등을 사들여 화제가 됐다.

하지만 충무로 안의 병폐가 곪아터져 나올 때면 뻔쩍뻔쩍대는 승용차는 맨 먼저 공격과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한국일보> 1963년 2월22일자 기사는 “배우는 자가용 타고 감독은 택시 타고 제작자는 버스 타고 촬영장에 간다”는 충무로의 우스갯소리를 소개하면서 감독 중엔 지프차나마 갖고 있는 이가 홍성기 등 고작 셋뿐이고, 대부분의 제작자는 “월 2만7천원을 내고 전세로” 차를 이용하고 있다면서 소득 불균형을 지적했다. 1975년 감독들과 스탭들이 제작자를 상대로 개런티 인상 요구를 할 때에도 마찬가지. 영화법 개정으로 독점권한을 갖게 된 12개사 제작자들에게는 “요즘 제작자는 고급 승용차 타고 배우는 택시 타고 감독은 걸어서 (촬영장에) 간다지?”라는 힐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바깥에서 볼 때 고급 승용차가 쌩쌩거리는 충무로야말로 꿈에서도 그리던 천상의 낙원이었다.

공연히 머리 싸매고 10년 넘게 공부해서 관료나 공무원이 되기 위해 죽을 힘을 쓰느니 “현대생활 입신(立身)의 챔피언”인 스타가 되겠다고 나서는 것이야말로 훨씬 가치있다는 주장까지 나왔을 정도다. “서울은 만원이고 또 지옥”이라는 외침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음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에 경부고속도로 상행선은 언제나 무작정 상경 인파로 북적였고, 그중에는 언젠가 “자가용 타고 친정 가겠다”는 기대를 가슴에 품은 배우 지망생들로 득시글거렸다. 그리고 터미널 주위에는 그들을 노려서 쏠쏠히 재미를 봤던 사이비 영화인들 또한 넘쳐났다. 꿈을 품었건 아니면 그 꿈을 이용했건 이들 중에 운전기사 앞세우고 선물 보따리 싸들고 자가용 몰고 경부고속도로 하행선을 타며 휘파람을 불었던 ‘마이카족’은 손꼽아 얼마나 될까.

참고자료 <서울 20세기 생활·문화변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