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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일렁이는 초록 들판, <The 3rd Place>

이상은의 음악적 일대기는 드라마틱하다. 내가 기억하는 한, 한국에서 이상은 같은 방법으로 시작해서 이상은 같은 과정을 거쳐 이상은 같은 위치에 오른 이는 아무도 없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는 데뷔 당시의 이상은은 ‘그저’ 인기 가수였다. 크리스마스 캐럴 음반까지 냈던 인기 가수. 인기는 사그라들었고, 그 사이 대중의 인정과 자기의 욕심 사이에서 방황했던 준작과 실패작들이 나왔다.

상황이 바뀐 것은 1993년 즈음부터다. 그녀는 <언젠가는> 같은 곡을 만들고 부르면서 ‘인기 가수’가 아니라 ‘싱어 송 라이터’로서의 이상은이라는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이어 나온 두장의 음반, <공무도하가>(1995)와 <외롭고 웃긴 가게>(1997)를 통해 이상은은 ‘작가주의 뮤지션’이 됐다. 명료하고 날카로운 음악적 감각과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감성에 호소하는 낭만적인 언어로 이루어진 음악. 넓고 얕은 인기 대신 충성스런 일군의 숭배자를 얻은 것도 이때부터다.

이상은의 정체성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던 것도 이때부터다. 그녀는 과연 ‘진정한’ 뮤지션인가 아니면 진정성과 자의식 과잉을 혼동하는 겉멋 들린 스타일리스트일 뿐인가? 리채(Leetzsche)라는 ‘국제적’ 이름으로 발표한 <Asian Prescription>(1999), <Endless Lay>(2001)는 논란을 증폭시켰다. 이 음반들에서 이상은은 신비주의와 오리엔탈리즘, 뉴에이지가 뒤섞인 애매한 (음악적) 신격화를 시도했다. 매끈한 사운드와 노래에도 불구하고 스타일과 관념이 내용을 억누르는 순간이 계속 드러났다.

최신작인 <The 3rd Place>는 전작 <Romantopia>(2005)의 연장선상에 있다. ‘작가주의 뮤지션 이상은’의 음악적 오디세이를 요약하고 있지만 <외롭고 웃긴 가게> 시절의 독기나 ‘오리엔탈 뉴에이지’ 시절의 장막이 걷힌 덕에 훨씬 접근 용이하다. 그동안 이상은과 함께해왔던 ‘국제적 인맥’들이 모여 소리를 다듬었다. <야상곡> <삶은 여행> <제3의 공간> 등에서 특히 좋은 울림을 전달하고 있는 이 음반은, 푸른 하늘과 선명한 햇살 아래 펼쳐진 초록 들판을 공중부양하며 떠돌아다니고 있는 듯한 음악적 경험과 정서적 안온함을 전달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음악 위에 실린 언어는 ‘의미를 모를 땐 하얀 태양을 바라보’는(<삶은 여행>) 자세로 살아가는 ‘행복한 아나키스트’가 돼라는 권유다(<야상곡>). 행복, 꿈, 동경, 긍정 등의 관념들이 파스텔 톤으로 출렁거린다. 영어 가사가 없었다면 초점이 더 선명했을 것 같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코스모폴리탄 예술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이 음반에 갖는 거의 유일한 (개인적) 불만이다. 이상은의 팬이었다면 익숙한 기쁨을 느끼며 반복 청취할 것이고, 이상은을 처음 접하는 이들이라도 ‘가요 같지 않게 낯설지만 풍성하고 편안한’ 사운드에 놀라면서 이 음반을 귀에서 쉽게 떨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