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어린이 종교 개혁
고경태 2007-11-09

있다! 없다? 만약 SBS 오락프로그램 <신동엽의 있다! 없다?>에서 다음의 주제를 다룬다면 어찌 될까.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있다! 없다?”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이 죽어서 떨어진다는 불구덩이 지옥은 있다! 없다?” 아마 기독교인들의 항의로 전국이 들끓을 것이다. 해당 방송사는 폭파 위협을 받을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심심하면 그런 이야기로 논쟁했다. 누가 교회를 다닌다고만 하면 친구들은 괜히 시비를 걸었다.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이 있다고? 말도 안 돼!” 나는 ‘있다’쪽이었다. 유치하고 엉성한 논리였지만 입에 거품을 물고 주장했다. 과학으로 풀리지 않는 수많은 불가사의한 영혼의 세계를 신없이 어떻게 설명할 거냐고 말이다. 친구들은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정말 하나님이 있으면 왜 모든 세상 사람들이 착하게 살도록 못 만들지? 그런 능력도 없으면서 무슨 신이야?” 자주 티격태격 언쟁을 벌였지만 늘 결론은 나지 않았다.

하나님은 ‘만들어진 신’이다. 수십억 대중을 현혹한 인류 최대·최고의 대박 아이디어 사기 상품이다. “없다”쪽에 선 이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자유다. 그들은 믿지 않을 자유가 있고, 신의 우산 밖에서 살아갈 권리가 있다. 아니다. 하나님은 존재하며, 전지전능하다. 믿으면 천당에 가고 영혼의 구원을 얻는다. 그렇게 믿는 “있다”쪽 사람들은 끼리끼리 뭉쳐 신앙생활을 할 권리가 있다. ‘있다’가 ‘없다’에게, ‘없다’가 ‘있다’에게 귀찮게 간섭하지만 않는다면.

한데 그렇지 않다. 내가 다닌 대학은 기독교 재단이었다. 예배의식인 ‘채플 과목’을 6학기 이수하지 못하면 졸업장을 안 줬다. ‘없다’쪽 학생들이 문제를 제기해도 학교당국은 당당했다. “우리 학교가 미션스쿨인 거 몰랐어? 그럼 애초에 입학을 하지 말던가.” ‘있다’ 진영의 횡포였다. 지금도 그렇다. 대학뿐 아니다. 기독교인이 이사장을 지내는 전국 수백개의 중·고교에서도 예배참여를 강요한다. 교회 장로 등이 경영하는 중소규모의 회사에서도 의무적 종교의식을 둘러싼 승강이가 간간이 벌어진다.

얼마 전 이와 관련된 중요하고도 상징적인 판결이 내려졌다. 2004년 서울 대광고의 학내 종교교육 강요에 맞서 단식투쟁을 벌이다 퇴학처분을 받은 강의석(21)씨가 대광고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1심에서 이긴 것이다. 서울중앙지법은 “대광고는 원고에게 1500만원을 지급하라”면서 종교자유쪽의 손을 들어줬다. 종교사학을 대상으로 강의석씨와 비슷한 소송을 준비해온 학생·학부모·시민단체들이 소송 제기에 팔을 걷어붙인다는 소식이다.

나는 이 사건을 보면서 좀더 근본적인 ‘종교의 자유’를 상상했다. 태어날 때부터 종교선택의 자유를 빼앗긴 이들은 나중에 부모를 대상으로 손해배상소송이라도 벌여야 하는가. 나는 ‘모태신앙’이다. 모태, 즉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신앙을 가졌다는 사실은 움직일 수 없는 운명처럼 받아들여진다. 이 땅의 대다수 기독교인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신실한 믿음을 갖고 교회에 출석할 것을 요구하고 이를 당연시한다. 어릴 때부터 부모의 영향 아래서 기독교 교육을 받은 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쉽게 그 자장 밖으로 벗어나지 못한다. 다른 종교를 믿는 배우자와의 결혼도 쉽게 허용되지 않아 갈등의 불씨가 되기도 한다. 종교사학에서의 신앙행위 강요는 길어야 몇년이지만, 가정에서의 그것은 평생을 결정하는 셈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괴팍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중 개신교가 심하다. 여기서 괴팍하다는 것은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독선적이고 배타적이라는 뜻이다. 한국의 주류 기독교계는 성서에 적힌 글자가 일획일점도 오류없이 진리라는 ‘축자영감설’을 지지한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인정하는 ‘종교다원주의’를 사탄의 논리 취급한다. 또한 죽어서 천당 가는 개인의 구원문제에 절대적으로 매달린다. 십자가를 지는 자세로 불의한 권력에 대항한 역사의 자취는 별로 없다. 최근 발간된 <추락하는 한국교회>의 저자인 신학자 이상성 박사는 “한국의 기독교는 차라리 샤머니즘에 가깝다”고 진단한다. 문제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어린아이들이 말을 깨우치거나 사물 판단력이 형성되기 이전에 그런 편협한 종교관에 ‘의식화’될 염려가 크다는 사실이다. 내가 별 걱정을 다 하는 건가? 예수천당/불신지옥 같은 극단적 이분법이 자라나는 꿈나무들의 정서와 건강한 기능을 할 것 같지는 않다.

앞에서 언급한 신학자 이상성은 기독교인 부모 밑에서 자라면서 자연스레 신앙을 가졌다고 한다. 그 역시 부모가 그랬듯 자신의 딸을 교회에 데리고 나갈 수 있다. 실제 그렇게 하고 싶은 욕심이 든다. 하지만 억지로 교회에 데리고 나가지는 않는다고 한다. 어른이 되어서 다양한 종교를 접해보고 자신이 어떤 종교를 선택할지 객관적인 판단을 한 뒤 신앙을 갖게 하고 싶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에는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 눈치를 보며 효도 차원에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참 많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불교인을 부모로 둔 이들보다 그 양상이 훨씬 심할 거다. 기독교를 믿든, 이슬람교를 믿든, 힌두교를 믿든, 남묘호렌게쿄를 믿든, 그건 개인의 선택이다. 어린이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유권자가 올 대선에 누굴 찍을까 후보자를 고르듯, 신중하게 생각하고 공부하고 체험한 뒤 여러분의 종교를 선택합시다. 헷갈리면, 성인이 되어서 판단해도 늦지 않아요. 이것을 또 하나의 ‘종교개혁’이라고 하면 너무 오버일까. 아무튼 민주주의 학습의 소중한 첫걸음이 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